世上事

피에르 신부의 죽음

들풀처럼1 2007. 2. 3. 20:21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94년간의 삶 마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굳이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가 선종했다. 1월22일 새벽 5시께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서 94년간의 성스러운 삶을 마쳤다. 그리고 이틀 뒤 대중에게 문을 연 ‘발 드 그라스’ 성당 앞에는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그렇게 1~2시간씩 기다리더라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 피에르 신부에게 마지막 애도를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 아베 피에르신부(1912~2007년)는 20세기 후반 내내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통했다. ‘에마우스’ 전통은 인종이나 종교를 초월하는 인본적 공동체다.(사진/ EPA/ 연합/ LUCAS DOLEGA)

 

“내 무덤에는 꽃이나 화환 대신, (앞으로) 집 열쇠를 가지게 될 수천 명의 (무주택) 가족과 아이들의 목록을 가져다달라”고 평소 말하던 피에르 신부는 “꽃 살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신부의 유품인 베레모와 지팡이만 오롯이 관 위에 자리하는 아주 검소한 빈소에는 그 자리를 찾은 익명의 수많은 남녀노소들의 눈에 영근 눈물 꽃이 화려한 화환을 대신했다.

 

피에르 신부와 가까운 이들은 벌써 몇 년 전부터 그의 임종을 준비해왔던 터였다. 하지만 신부의 임종 뒤 “피에르 신부의 임종으로 프랑스 전체가 충격을 받았고 슬프다”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말처럼, 신부의 임종 소식은 오랜 병환 뒤에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처럼 프랑스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신부-레지스탕스-국회의원을 거쳐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에 이르기까지, 피에르 신부의 삶은 내면적으로 심오한 구도자의 것인 동시에 온갖 장벽에 맞서 현장에서 직접 싸웠던 활동가의 그것이기도 했다.

 

1949년 전직 목수이자 자살을 기도했던 어느 살인자에게 피에르 신부가 “죽을 작정이라면, 죽기 전에 나랑 같이 남을 돕자”면서 같이 첫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에마우스 자립 공동체’의 출발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피에르 신부는 세비를 고스란히 갖다바치고도 사사로이 빚까지 내어 공동체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나날이 불어나는 공동체이다 보니, 재정난에 부딪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재정난 타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그가 시작한 활동은 넝마주이였다. 소비활동의 소외자들이 소비사회가 버린 쓰레기를 뒤져서 건진 물건들을 팔아 집을 짓는 자재를 마련했다. 이런 전통은 ‘재고품 수거’로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주며, 인간의 존엄성을 무엇보다 존중하는 것이 피에르 신부의 신념이자 에마우스 공동체의 정신이다.

 

1953년 정식으로 에마우스 협회가 결성됐고, 1954년 겨울 전례 없는 혹한으로 노숙자들이 목숨을 잃어가던 상황에서 피에르 신부의 ‘친구들이여 도와주세요’라는 라디오 선언과 더불어 에마우스는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런 연대의 전통에 기반해 세워진 에마우스는 사회에서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자재로 희망을 건설해가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1971년에는 ‘국제 에마우스 협회’가 발족돼 현재 전세계에 걸쳐 4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350여 개, 프랑스에만 110여 개의 에마우스 공동체가 건설돼 있다. 그 외에도 1988년 피에르 신부 재단이 설립돼 극빈자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의 여성 사제 허용과 남성 사제의 결혼 허락 등을 외쳐 보수적인 바티칸의 눈총을 받기도 한 피에르 신부였는데, 그의 마지막 저서에선 ‘사제로서 성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발언으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나 인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신앙심을 잃은 적이 없다는 피에르 신부는 자유로운 동시에 충직한 인물이었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강한 자들로 향하는 길이며 그건 욕망이고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약한 자들로 향하는 길이며 그건 바로 평화다.’ 피에르 신부는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는 시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시인은 죽어도 시는 남는 것처럼, 성인은 숨졌지만 그 정신은 남게 되기를.

 

가져온 곳 : 한겨레21 제646호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