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악기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펜 파이프란 악기는
아직 누구에게도 설명없이 이해가 될 만한 시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팬 파이프 또는 팬 플루트라고 부르는 이 악기는 본고장인 루마니아에서는
나이 Nai라는 갈대로 만드는, 여러 개의 세로 피리를 연결시킨 관악기의 일종이다.
우리가 팬 파이프라고 부르는 악기는 실은 이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6천 년 전부터 고대 각국에 분포되어 현재까지도 유럽의 일부 국가에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 나이는 18세기 무렵까지는 여덟 개의 세로 피리를 연결시킨 8본관(本管)이
기본형이었으나, 점차 그 수가 증가해서 20관에서 23, 35, 28관으로 늘어
현재는 30관까지 등장했다. 좁은 음역밖에 내지 못하는 전통적인
팬 파이프의 가능성을 더욱 크게 확대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팬 파이프의 아주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피리가 이미
유사 이전 세계의 원시인족 사이에 존재하고 애호되고 있었던 사실은
고고학이나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기원은 아득히 그리스 신화시대로 거슬러 을라간다.
말라르메의 시, 또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유명한
팬 Pan은 목가(牧歌)의 창시자라고 하는 목신(牧神)이다.
팬은 피리를 불며 알카디어 일대의 산과 들을 떠돌아다니며 염소와 가축 그리고
꿀벌 치는 것을 돌보고, 사냥꾼을 도와 짐승을 찾아 주기도 하고,
산의 요정들을 희롱도 하는 장난꾸러기였다.
팬은 남국의 신답게 성미가 태평하고 때때로 오수를 즐기는데
그의 잠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혼을 내주곤 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계도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양이고
양처럼 머리에 뿔도 달려 있어서 알카디어 일대의 산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괴물 같은 팬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
집 또는 군중심리적인 공황(恐慌)이란 뜻의 영어 패닉 panic 은 바로
팬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군중심리에서 유래가 된 말이기도 하다.
팬은 알카디어 강의 요정 시링크스 syrinx를 마음에 두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팬의 흉한 모습을 싫어한 시링크스는 언제나
팬의 구애를 거절하면서 피해다니는 것이었다.
마침내 팬은 시링크스를 붙잡아 자신의 사랑을 모두 다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팬이 죽도록 싫은 시링크스는 아버지인 강의 신에게 부탁해서
갈대로 몸을 변신해 버리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팬은 시링크스를 그리워하여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이것이 곧 팬의 피리 팬 파이프인 것이다.
아마도 1970년대 이후 유행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이벤트의 하나로
루마니아의 민속악기 팬 파이프의 등장을 들 수 있다면,
조르지 잠피르의 이에 대한 기여는 특기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조르지 잠피르 이전에도 로스 차꼬스나 우루밤바 등에 의해서
남미 안데스 일대의 민속음악이 유행음악의 세계에 소개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안데스 민속음악은 국외자들이 피상적으로 현대화시킨 외면적인
음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잠피르가 들려주는 루마니아의 민속음악에서 우리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윈시적 순수성과 향토색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잠피르는 1941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시티 근교 게스티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원에서 양떼들을 돌보며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의 꿈을 길러 온 잠피르는
음악을 좋아해서 보헤미아의 병사들과함께 고향의 결혼식에서
아코디온을 켜기도 하며 즉흥 연주를 하였는테,
이러한 어린 시절은 일생을 통해 그의 예술활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조르지 잠피르는 그 후 부쿠레시티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화성악 · 대위법 ·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관현악적 기법 등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립시킬 수 있었다.
음악원 졸업 후 그는 최초의 연주 체험을 갖게 되었다.
루마니아 민속 예술단인 시오르실리아Ciorecilia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연주생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다.
1970년 잠피르는 '타라프 Taraf'라는 소편성의 포크 그룹을 조직하여
유럽 전역에 걸치는 순회공연을 한 바도 있고,
1976년에는 첫앨범 '여름날의 사랑 Ete d'amour'을 발표하여 전세계에
팬파이프의 매혹적인 음색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그가 내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서독의 인기 오케스트라 지휘자
제임스 라스트가 그에게 헌정한 '외로운 목동 Einsamer Hirte'이다.
우리나라에선 조르지 잠피르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 곡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비스러우면서도 로맨틱한 무드를 전해 주는 '외로운 목동'은
1977년 한 해 동안 유럽에서만 1백50만장 이상의 레코드가 팔려나가는
밀리언 셀러가 되었으며, 이것이 '팬 파이프의 르네상스'를 전개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그리스의 에페소스란 곳에는 목신 팬이 시링크스의 피리를 보관했던
동굴이 있으며, 오래된 그곳에는 처녀성(處女性)의 시험이 행해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설의 내용인즉 진정한 처녀를 이 동굴 속에 가두어 놓으면
시링크스의 피리 소리가 들리면서 동굴의 문이 저절로 열려 처녀는
솔잎으로 만든 관을 쓴 채 다시 밖으로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처녀성을 속인 아가씨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이런 전설에 접하는 것으로만도 우리는 팬 파이프의 목가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오늘날 그 형체와 기능은 크게 변했으나,
팬 파이프는 어디까지나 '목신의 피리'이다.
요정의 시링크스가 들려 주는 음색이라는 점에서 본질의 변화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설을 현대에 전해 주는
유일한 악기로서 팬 파이프를 이해해도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