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事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반론

들풀처럼1 2007. 9. 16. 07:08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나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세상 만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가면 최초의 원인,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이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 제1원인론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일정한 목적에 맞게 설계했다는 목적론을 살펴보자. 이것은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든가,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둘째,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왜 최선의 인간·최고의 현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는 매우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 예수는 자기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분노한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데 그쪽이 훨신 더 성자답다.
예수는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무화과를 저주해 시들어버리게 한다. 나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사람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람이 사악해진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 대부분이 극악했다.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 형법의 개선, 전쟁 감소, 유색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적 조직인 교회세력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다.

-종교 극렬할수록 잔인성 커져-

이상은 버트런드 러셀이 1927년 3월6일 영국 베터시읍 공회당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내용이다. 이 강연이 80년 지난 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최근 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 보아도 좋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러셀이나 도킨스가 없다. 이유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국회를 움직여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게 만드는 막강한 학원재벌이며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자르듯 잘라내는 무자비한 대자본이자,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강력한 정당이고, 신을 팔아 거부가 되는 방법을 아는 탁월한 상인이며, 그 부가 혈맥 속에서 자자손손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봉건적인 세습권력이다. 누가 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도전할 것인가.

물론 기독교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리는 일부의 일탈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허용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 전체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극소수만 문제일 뿐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비판은 그만큼 기독교가 건강하다는 증거로 이용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살찌우는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식당인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두타 스님은 이날도 식당운영비 마련을 위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천국’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거리 전도를 하던 남자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 스님의 머리를 흔들며 회개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너그럽게도 극소수 기독교인의 행위라며 넘어갔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본질이다. 독선과 배타성, 다른 문화에 대한 무례, 가히 폭력 수준인 선교방식과 호전성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특질이다.

-사회·교회 관계 진지한 고민을-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을 잊을 만큼 크지 않고, 세속의 권력을 쥐고 흔들 만큼 오만하지 않으며, 남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절제를 모르는 한국 기독교는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많이 가졌다.

〈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가져온 곳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0708011750391&code=990339

 

-“기독교 오점은 곁과지 불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칼럼에서 이대근씨는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인과 원인론을 근거로 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 논리로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 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 있다는 힌두교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수난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유지되어 왔으며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도 이 인과 원인론의 근거 위에 신앙을 유지·발전시켜온 것은 확실하다. 인과론을 부정한다면 인류의 생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진화론의 과학은 우연한 것에서 목적을 찾으려고 비목적적인 것에 사용하려는 역리적 현상을 자아내게 하는 데 그 모순을 드러냈다.

진화론은 아직까지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불과하다. 우주의 생성과 그 연대 생물 발생과 그 연대들 지층형성에 대한 동일 과정설, 이 모두가 증명되지 않은 가설들이다. 현재까지 완전한 종의 변이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감나무가 포도나무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할 수 없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이다. 특히 사람은 동물처럼 육만 가진 존재가 아닌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글쓴이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을 들어 예수의 도덕성에 흠집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는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린 책임을 물은 교훈으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된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 많은 오류와 오점의 역사가 있었던 것도 간과하지 않으나 그것은 기독교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그러하기에 종교개혁은 현재에도 계속 진행형이어야 한다.

기독교의 화해와 사랑, 용서, 일치, 평등, 인간의 생명 존엄의 가치, 창조질서 확립 등의 가치는 앞으로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존재할 것이다.

신앙의 당위성은 너무나 많다. 우선 신앙생활을 하면 그동안 세상이 원망스럽고 미움만 가득하던 것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또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바뀐다.

또한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고, 영원한 세계가 보인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에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여유가 생기는 것 또한 당위성의 하나다. 가난해도 부자 같은 삶을 살고 무명해도 유명한 사람처럼 살아가게 된다. 이웃을 돌아보게 된다.

한번뿐인 인생을 정말로 가치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것을 마다하고 소망 없이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보면 정말로 약이 오르는 일이기에 나는 기독교인으로 오늘도 살고자 한다.

〈이선규 금천장로교회 목사〉  

가져온 곳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161741361&code=9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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