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事

솔직토크 위기의 40대

들풀처럼1 2005. 10. 8. 08:24
"남편님, 제발 밤낚시 좀 많이많이 가세요"
[솔직토크] 위기의 40대? 그건 아줌마 하기 나름
텍스트만보기   김정혜(k26760) 기자   
40대 여성을 일컬어 '위기의 중년'이라고 한다. 사실 40대는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강요받았던 50~60대 어머니 세대도 아니고, '가족보다 자아실현'을 중요시 하는 20~30대도 아닌 중간에 '낀' 세대다. 젊은 것도 아니고 나이 든 것도 아닌, 어중간한 40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까. 40대 여성은 정말 위기인가. 그 인생의 절반 위에 서 있는 중년 여성 세 명이 모여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어느덧 사십 줄에 들어선 나를 발견하다

김정혜 "장을 봐도 꼭 한 가지는 빼먹고 안경을 벗어 놓고는 어디다 놨는지 생각이 안 나 몇 시간을 동동거리질 않나. 이제 슬슬 건망증의 포로가 되나 봐요."
ⓒ2005 김혜원
김정혜(이하 정혜, 42): "요즘 날씨 정말 좋죠? 근데 나이가 들긴 들었는지 가을바람이 작년하고 다르게 느껴져요. 약간 을씨년스러운 게, 이럴 땐 진짜 내가 40대 중년 '아줌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김혜원(이하 혜원, 45): "말도 마요. 저는 40대 접어들고 나서 정말 목소리가 커졌어요. 물리적인 크기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까지요(웃음). 친어머니가 굉장히 조용하고 순종적인 분이셨는데 연세 드시고 나서 어느 날부터 목소리가 커지셨거든요.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요즘 제가 예전 엄마 모습, 딱 그거라니까요.

다들 안 믿겠지만 저 20, 30대에는 조선시대 여인처럼 살았어요. 정말이에요(웃음). 남편한테 말 한 마디 못하고 옴짝달싹도 못했어요.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죠. 엄마가 그렇게 하는 걸 봐서 그런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래도 제 주장을 조금씩 펴나가고 있어요. 40대라는 나이에 얻은 보너스죠."

장미숙(이하 미숙, 41): "나이 먹으니까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아요. 40대가 되니까 건강이 아주 각별해져요. 40대 성인병에 대해 말 많잖아요. 특히 우리 주부들은 유방암이나 자궁암 위험도 크고…. 요즘에는 일부러 틈내서 운동도 해요."

혜원: "전 사십에 자궁근종을 발견했어요. 제 사십대는 그렇게 시작됐죠. 그렇게 사십대가 되고 보니 제약이 참 많더라구요. 삼십대에는 되는데 사십부터는 안 되는 것들…. 주부들이 그나마 쉽게 할 수 있는 모니터 같은 일을 하려고 해도 나이에서 걸리니까 아주 허무하더군요."

정혜: "전 요즘 점점 총기가 떨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TV에 예전에 본 것과 비슷한 장면이 나오면 그게 뭔지 가물가물하면서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장을 봐도 꼭 한 가지는 빼먹고, 안경을 벗어 놓고는 어디다 놨는지 생각이 안 나 몇 시간을 동동거리질 않나. 매일 전화하던 친구 전화번호도 까먹고…. 이제 슬슬 건망증의 포로가 되나 봐요."

우리도 한때는 꿈 많은 여성들이었다

미숙: "세월 가는 게 팍팍 느껴지니까 왜 그렇게 아쉬운 게 많은가 몰라요. 전 가슴이 다 녹아내리는 '불타는 사랑' 한 번 못해 본 거, 그게 그렇게 아쉬워요. 이십대에는 다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잖아요. 근데 막상 결혼했는데 남편이 제 이상형과 너무 거리가 있는 거예요. 한때는 너무 절망해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기도 했어요. 이제 생각하면 철없는 짓이었지만."

정혜: "맞아요. 사랑에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젠 그런 사랑이 찾아와도 기운 없어서 못할 걸요(웃음). 전 30대 중반에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진 나름대로 알콩달콩 살고 있어요. 전 사랑보다 공부에 대한 미련이 커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학을 1년 다니다가 포기했어요. 물론 그땐 '다음에 돈 벌어서 대학 가야지'라고 생각했죠. 근데 돈도 공부도 뜻대로 되지 않았죠. 20대를 돈 번다고 다 보낸 것 같아요."

혜원: "저에게 20대나 30대가 있었나 싶어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 시어머니. 그 속에서의 나뿐이었어요. 30대 후반쯤 되니 갑자기 허무해지더군요.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쁘고 아이들은 학원 갔다가 늦게 오고. 시간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때 그 허전함이란…."

늘어진 젖가슴과 불룩한 아랫배는 아줌마의 훈장

김혜원 "30대 후반쯤 되니 갑자기 허무해지더군요.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쁘고 아이들은 학원 갔다가 늦게 오고. 시간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때 그 허전함이란…."
ⓒ2005 김혜원
정혜: "근데 아줌마니까 편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웃음). 우리 남편은 어디 갈 때 저를 꼭 데리고 가요. 뭐, 든든하다나. 남자들은 물건을 사고 맘에 안 들어도 그냥 넘어가지만 우리 아줌마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꼭 자기 맘에 드는 걸로 바꾸죠. 식당에 가도 맛있는 반찬 나오면 남편은 더 달라는 소릴 못하지만 전 밥 더 달라, 반찬 더 달라 당당하게 말하거든요. 그럼 남편이 그래요. 아줌마가 되면 원래 그렇게 매사에 당당해지고 얼굴이 두꺼워지냐고…."

미숙: "사람들은 아줌마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것 같아요.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없었다면 한국 가정의 절반은 붕괴되었을 거예요. 친구 중에 남편이 카드 빚 얻어 경마해서 망한 사람이 있어요. 당연히 이혼 소리까지 나왔죠. 근데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못하고 남편마저 자포자기하는 바람에 빚은 물론이고 생계까지 책임지게 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건물 청소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더래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 옷도 얻어다 입히고 버려진 물건도 주워 쓰고….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게 억척 떨지 않으면 내 새끼들이 밥을 굶는다', 그 생각밖에 안 나더래요. 그게 바로 아줌마의 힘이고 엄마의 힘 아니겠어요?"

혜원: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가 있잖아요. 지저분한 파마에 듬성듬성 난 흰머리, 축 늘어진 젖가슴과 불룩한 아랫배, 주름진 눈가와 굵어진 손마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잖아요. 전 그게 아줌마의 훈장이라고 생각해요.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겠어요? 남편이나 아이들을 우선시하다 보니 자기를 돌볼 겨를이 없는 거지."

현명하면서 섹시한 아내? 그건 남편들의 이기심

미숙: "근데 남자들은 자기 부인이 현명한 아내인 동시에 매력적인 여자이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요즘 그 연속극 있잖아요. <장밋빛 인생>. 거기서 주인공인 맹순이 보고 그 못된 남편이 힐책하잖아요. '너도 여자냐?' 그러면서. 그거 보는데 어찌나 화가 나든지…."

정혜: "알뜰살뜰한 아내인 동시에 매력적인 여자가 되길 원하는 거, 그건 남자들의 이기심이죠. 결국 남자들은 슈퍼우먼 아내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것도 나이 들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아내 모습도 눈에 들어오는 거죠. 사는 데 아등바등했던 20, 30대엔 그런 게 눈에 들어올 새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다시 여자로 태어나 보자구요."

혜원: "전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드라마 보면서 많이 자극 받아요. 마흔에도 아름다운 그녀들, 마흔에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그녀들을 보면 우리가 40대라는 나이에 지레 주눅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죠."

고개 숙인 남편들, 힘들면 손을 내밀어줘요

장미숙 "주말부부인 친구가 그러는데,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이면 가던 남편이 어쩌다 하루 더 집에 있으면 그게 그렇게 갑갑하데요. 이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더군요."
ⓒ2005 김혜원
정혜: "여자들은 나이 먹으면서 더 활기차지는 것 같은데 남자들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전 나이 들고부터 남편이 가엾어 보여요. 특히 뒷모습이 그렇게 신경 쓰여요. 베란다에서 담배 피울 때나 출근할 때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라든지….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요. '이제 저 남자도 늙었구나, 중년이구나'하는 그런 짠함이랄까."

미숙: "저도 그래요. 요즘 들어 남편에게 너그러워지고 또 용서도 쉬워지더라구요. 의식적으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등바등 싸워 봤자 뭐 할 거며 또 싸워서 이기면 뭐 할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라고 인정한다고 할까. 이게 남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걸까요?"

혜원: "젊었을 때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한 이십 년 살아보니 이젠 기대기 편한 오래된 의자 같다고나 할까요? 낡고 볼품없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편안함을 주는… 때로는 못이 비집고 나와 엉덩이를 긁히기도 하고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 망치질도 해 줘야 하는… 나이 들어서 이 정도만 되도 성공한 부부가 아닐까 해요. 전 이런데 남편은 아직도 제 앞에서 강한 척을 해요.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남편도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 텐데…. 힘들다고 손이라도 내밀면 따뜻하게 잡아줄 텐데…. 끝까지 강한 척하는 그 자존심이 야속하고 밉기도 해요."

아줌마들도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

미숙: "주말부부인 친구가 그러는데,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이면 가던 남편이 어쩌다 하루 더 집에 있으면 그게 그렇게 갑갑하데요. 친구 말이, 예전엔 남편과 있는 게 '당연히' 즐거웠는데 이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더군요."

정혜: "저도 그래요. 옛날에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남편보다 먼저'는 아니었거든요. 요즘엔 내가 하고 싶은 게 우선이에요.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매력도 알게 된 것 같고."

혜원: "다 똑같네요. 요즘 저도 남편이 저녁 먹고 들어온다는 소리가 가장 반가워요(웃음). 여자들은 혼자인 시간이 드물잖아요. 늘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니까. 40대에 들어서니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결혼 전 가졌던 꿈도 되짚어 보고 싶기도 하고. 바라건대 우리 남편들이 저녁도 자주 먹고 들어오고 가끔씩 출장도 가 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정혜: "나도 동감(웃음). 근데 참 이상한 게 남자들은 40대가 되면 더 애틋하게 가정을 찾는 것 같아요. 우리 남편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낚시 가는 게 취미였거든요. 그것 때문에 다투기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가라고 등 떠밀어도 절대 안가요. 함께 갈 거 아니면 절대 안간데요. 친구들 술자리도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이젠 그것도 시들한가 봐요. 남편 친구들도 그렇고."

우린 남다른 40대를 살아가련다~

▲ 우리는 아직 젊다!
ⓒ2005 김혜원
미숙: "전 나이 들면 남편하고 시골 내려가서 살 거예요. 그러면 부지런히 벌어서 저축도 해야 하는데…. 이젠 가족보단 저를 위해 투자하고 싶어요.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문화생활도 누리고 싶어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여행도 하고 못다 한 공부도 더 하고 싶어요."

정혜: "마흔이 됐을 때 이런 계획을 세웠어요. '오십에는 글 쓰는 걸로 좀 더 확고한 자리를 가지자'고. 글 써서 고정적인 수입까지 있다면 더 좋겠지만요. 그래서 일주일에 적어도 책 3권은 읽자고 스스로 약속했는데 지금까지는 잘 지키고 있죠."

혜원: "우리 세대는 자식에게 의존할 수 없는 노후를 맞게 되겠죠. 전 노년을 위해 건강과 일, 경제력을 갖추고 싶어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계모임도 하고 남편 몰래 자투리 돈을 모아 딴 주머니도 만들고 있죠. 그리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러 다닐 거예요."

정혜: "누구는 40대는 뭔가 시작하기에도, 뭔가를 포기하기에도 참 어중간하다고 하던데 얘기를 하다 보니 40대보다 바쁜 때는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여자들은 40대에 갖게 되는 여유를 잘만 활용하면 더 활기차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혜원: "동감! 다들 '위기의 40대'라고 하는데 사십대인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있잖아요. 옛날과 요즘의 40대들이 느끼는 차이가 바로 이거 아닐까요? 예전에는 여자들이 오로지 자식과 남편만 위해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여유로워지는 것에 당황하면서 위기감을 느꼈지만 요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40대에는 여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미숙: "중요한 건 바로 그거 같아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간다는 자세. 내게 주어진 여건을 충분히 활용하면 마음의 낭비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정혜: "우리들의 40대는 '위기의 40대'가 아니라 '바쁜 40대'가 맞는 말이겠네요. 행복이 뭐 별거 있나요. 뭔가를 위해 바쁘게 사는 거, 바로 그게 삶의 행복이죠. 우리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자' 한번 외치죠."

혜원, 정혜, 미숙: "아줌마들의 행복한 40대를 위해서 아자! 아자! 아자!"

▲ 얼마 전 물길이 열린 서울의 청계천 구경에 나섰다. 저 밝은 표정처럼 중년을 헤쳐 나가길.
ⓒ2005 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