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비비추꽃의 전설

들풀처럼1 2007. 4. 15. 17:54
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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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추 꽃의 전설

후두둑, 장대비가 마당을 긋고 간다. 개구리 울음 소리가 무논에 가득하더니, 이내 빗소리에 묻힌다. 빗속에 여인이 서 있다. 번개가 하늘을 찢는다. 그리고 천둥소리가 산을 흔든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이내 빗소리가 그녀의 울음 소리를 묻고, 천둥소리가 그녀의 흐느낌을 덮는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눈물을 흘려야 하고, 소리 죽여 흐느껴야 하는 여인의 이름은 설녀이다.

빗물이 설녀의 볼을 타고 내린다. 아니 눈물이다. 뜨거운 그리움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내린다. 가슴을 적신다. 발끝을 적신다. 설녀의 흐느낌이 장대비로 흩뿌린다.

"콜록콜록, 아가야,"

축축한 기침 소리와 함께 노인의 소리가 마루를 넘어간다. 비에 홈빡 젖어가는 설녀를 일으켜세운다. 설녀는 눈물을 닦는다. 빗물을 닦는다. 댓돌에 신발을 벗는다. 마루로 오른다. 방문을 연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는다.

"예, 아버님"
"오늘도 소식이 없지 않느냐?"
설녀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훤히 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나이 아흔을 넘기니, 하루하루가 덤이다. 이젠 내 눈 감기 전에 시집을 가거라."
"제 걱정은 마시고, 아버님은 얼른 일어나세요."

설녀는 아버님의 손을 꼭 쥔다. 밖에는 장대비가 더욱 세차다.바람이 점점 거세다. 태풍이 오고 있었다.

"내일은 거절하지 말고, 기실 청년과 혼인 약속을 하여라."
설녀는 흔들린다. 어찌하여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단 말인가?

설녀는 늠름한 청년 기실을 보는 순간,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가 걸어올 때, 설녀는 새파란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놀랬다. 들키지 않으려고 돌아서다 눈빛이 마주쳤다. 빨려 들것 같아 등을 진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화단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비스듬히 꽃대를 뽑아올린 이름 모를 꽃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처음보는 꽃이었다. 여름이 오기 까지 잎만 무성하였다. 그 녹색 잎이 여느 꽃보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뽑지 못했는데, 꽃대를 뽑아 올려 꽃망울 달고 있었다.

"어쩜 너는 내 마음을 쏙 빼닮았니?"

여러 개의 꽃봉오리는 한결같이 사립문 너머 동구밖을 바라본다. 한 꺼번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아래부터 차례로 피우는 것이 아닌가? 하나가 지면 하나를 피워내는 꽃, 언제까지 피려고 하는지...

설녀는 기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이 두려웠다. 기실 청년이 내일이면 찾아온다. 설녀는 정신을 차리고 6년 전을 떠올렸다.

'어찌하여 당신은 돌아오지 않습니까?'

오래 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크게 졌다. 형제의 예를 갖춰 백제를 마음을 달래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신라의 성을 빼앗았다. 지금 변방에는 싸움이 한창이니, 병사가 크게 부족했다. 하여 남정네는 모두 전쟁터에 내몰렸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전투는 벌써 반 세기를 넘기고 있었다. 성을 뺏고 빼앗기는 전투에는 병사가 늘 부족하였다. 늙고 병든 아버지가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관리를 찾아가 하소연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군대가기 싫어 변명을 만드는 사람이 한 둘이랴. 설녀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차마 멀리 보낼 수가 없다. 깊은 시름에 잠겨 달을 쳐다보았다.

그 때, 설녀를 마음에 두고 있던 '가놈'이란 청년이 설녀를 찾아왔다.
그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불초한 몸이지만 아버님의 병역을 대신하려 합니다."
라고 간곡히 말했다.

설녀는 기뻐하였다.
아버지도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설녀는 가놈이 아버지 대신 무사히 병역을 마치고 돌아오면 혼인하기로 언약했다.

"저 달은 기울었다 차오르지요."
"변방에도 달이 뜨면 아름다운 당신이 거기 있겠지요"

가놈은 전장으로 떠났다. 기실은 밤마다 달님을 보며 '가놈'이 무사히 병역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가놈은 6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병역 갔던 다른 사람은 다 돌아왔는데, 어찌 '가놈'만이 돌아오지 못한단 말인가?

가놈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장터에서 이름없이 전사하는 병사가 어디 한 두 명인가? '가놈'이 전사했으리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녀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렇게 무너지던 가슴이 기실 청년을 보면 다시 무너지다니...

"아버님, 저 마당의 꽃이 피었다 질 때까지..."

설녀는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마당가에 꽃을 정성껏 키웠다. 꽃이 오래오래 피어 아버지의 마음을 끌고 싶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거늘, 어찌 꽃에다 기한을 둔단 말인가? 설녀의 아버지는 눈을 감기 전에 딸을 시집 보낼 수 있으려니 기뻐했다.

"마당가에 꽃이 이번 비에 꽃잎 떨구고 다 지지 않았더냐?"
설녀 아버지는 기쁨에 넘쳐 마당을 보았다.
"아버님, 꽃이 다시 피었습니다."

설녀는 한 송이가 지면, 다시 한 송이를 떠트리는 꽃이 고마웠다. 흔드리는 마음을 꽃대에 매달고 설녀는 기다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면 지고, 피면 지고...꽃은 여름내내 석달 동안 끊임없이 꽃을 피워냈다. 마지막 꽃봉오리가 그윽한 향을 풍기며 보라색으로 피어 났다.

"약속한 날이 내일이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해라."

설녀는 더 이상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수 없다. 마당가에 선다. 퍼붓는 장대비 거세어진 바람 속에 선 설녀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다.

" 이 꽃마저 다 지기 전에 님은 어이 돌아오지 않으십니까?"

설녀는 야속해서 울다가, 전장에서 죽어간 가놈이 가엾어서 더욱 흐느낀다. 곧 날이 어둡다. 나무를 뿌리 채 뽑을 만큼 강한 바람이 설녀의 몸에 부딪힌다. 이런 날은 별도 달도 뜨지 않고, 구름 뒤에서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시운다. 그래서 밤은 더욱 사납고 무겁게 깊어간다.

사립문 저 편에서 흔들리는 검은 물체...배 고픈 도둑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걸어오는 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구인가? 한 쪽 다리를 잃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사람... 순간, 설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지만, 와락 껴안아 부축한다.

" 뉘신가요?"
절름발이가 주춤한다.
" 설.녀.입.니.다."
설녀는 목이 메인다.
"아아..."

가놈은 그토록 그리던 여인, 변함없이 그리운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가놈은 설녀를 와락 안는다.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비록 앞은 보지 못하지만...

"당신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납니다."
가놈은 설녀의 향기에 아찔하게 흔들리며 곧추 선다.

" 이 향기는 마지막 저기 꽃을 피운..."
" 한낱 꽃향기가 어찌 당신의 향기만 하겠습니까?"

가놈은 이 세상의 어떤 꽃향기보다 설녀의 몸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향기에 몸을 묻는다.

마당에 피어난 마지막 꽃송이는 은은한 꽃향기를 피워 올렸다. 잎이 무성한 꽃은 비바람 속에서도 꽂대를 꺾지 않았다. 모진 태풍 속에서도 향기를 가득 뿜어내는 꽃은 흔들리는 여심을 잡아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꽃이었다. 그 꽃이름이 바로 '비비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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