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인터뷰(1) - 과거 청산, 보수가 나서라
진보 진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우리에겐 춈스키 같은 사람이 없는거야’하고 개탄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현실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언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은 않고, 왜 그런 얘기만 하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그러면서 ‘한홍구 교수 같은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항간에 ‘한홍구가 여러 명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를 2006년 12월 30일 평화박물관에서 만났다. 한홍구 교수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집행위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평화박물관 운영 위원 등을 맡아 바쁘게 활동하는 와중에서도 최근에 ‘대한민국사 4’와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를 펴냈는데, 그에게 ‘위기에 빠진 진보 진영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근 뉴라이트가 준동(?)하는 것에 대한 생각, 과거사 청산 작업, 군 문제에 시민사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가, 북핵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지승호(이하 지) - 한겨레 21의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연재를 마치셨는데요. 대한민국사도 4권으로 완간된 건가요?
한홍구(이하 한) - 글쎄 연재는 끝났지만, 완간이라고는 생각 안했는데요. 임종업 기자가 서평을 쓰면서 완간이라고 얘기했으니까 일단 완간이 된 걸로 해야겠죠.(웃음)
지 - 민감한 소재를 재미있게 풀어낸 인기 코너였는데요. 고경태 편집장도 ‘역사물은 재미없고 딱딱하다는 통념을 처음으로 깨준 시사주간지 필자가 아니었나 한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연재를 그만두신 이유는 뭔가요? 선생님이 하시는 일 중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지만, 대중들에게 인권감수성과 평화감수성을 심어줬다는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 우선 일이 많아지다 보니까 준비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해졌고요. 특히 국정원 과거사위 일을 보고 있는데, 이건 시한이 있잖아요. 역사 이야기야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거지만, 이 작업은 지금 아니면 못하는 작업이고, 거기에 제가 책임을 맡고 있어서 이것 때문에 지장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원고 마감이 주 5일제 하면서 금요일로 바뀌었거든요. 월요일 날 마감을 할 때는 그래도 주말에 준비를 할 수가 있었는데, 어떨 때는 금요일 오후까지 일이 생기니까 금요일 저녁때부터 마감시간에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새벽 2시에 보내곤 하니까 편집부 사람들, 디자인팀 식구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나도 힘들고,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지 - 2004년부터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 업무를 맡고 계신데요. 역사 학자로서 자료를 보던 것하고 달리 민감한 현실적인 자료를 접하게 되는 걸 텐데요. 직접 국정원의 자료를 보시고, 조사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한 - 우선 역사학자로서 아쉬운 점은 자료가 너무 안남아 있다는 거예요. 똑같은 국가 기관이지만 국방부 과거사위는 보안사 자료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보안사는 자료가 아주 잘 보존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중앙정보부, 안기부는 자료를 처음부터 남기지 않았는지, 자료를 그때그때 파기를 잘했는지,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게 마이크로필름 자료인데, 거기에 넣지 않았는지 생각 밖에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어려움이 있죠.
지 - “이라크에 파병할 때도 그랬지만, 요즘 한미자유무역협정 문제나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자꾸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우리 사회 안에 머리 까맣고 한국말 잘하는 미국인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점이다. 이자들의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자주 이들은 오버에 오버를 거듭한다”고 하셨는데, 이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참여정부 스스로가 그런 기대들을 많이 저버리기도 했는데요.
한 - 한국 사회에서 반미라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한 게 80년대죠. 80년 광주를 겪으면서부터 반미라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그 후로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잖아요. 옛날하고 달리 반미운동도 굉장히 대중적으로 진행이 됐고, 많은 발전이 있었고,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에 여중생 사건과 관련해서 촛불 시위가 있었는데요. 노무현 당시 후보가 ‘반미 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는 말씀도 하셨고, 그래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희생도 치렀고, 이만큼 싸웠고, 이 정도의 힘도 보였으니까 80년대에 비하면 상당히 진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이라크 파병 문제가 나오니까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겁니다. 역사 이야기 연재를 2001년도 1월에 시작해서 2003년 1월에 일시 중단을 했는데, 노무현 정권 출범하기 직전에 그만둔 거죠.
그러고 나서 이라크 파병 문제가 불거지면서 보니까 깜짝 놀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친미라는 말 가지고는 표현이 안되는 현상이 있더라는 겁니다. 옛날로 치면 친일파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내선일체를 완전히 이루어 이미 일본 사람이 되었다라고 해주는 게 더 맞겠다는 싶은 사람들이 많이 정체를 드러낸 것 같아요. 친미파라면 한국 사람으로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다거나 미국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이것은 완전히 미국인이라는 거죠. 오히려 미국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한국 정부 내에, 한국 언론에, 재벌 내에, 학계에, 사회 곳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 - 노무현 정부가 그런 세력들에 대해서 결과적으로 굴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데 대한 긴장감이 없이 레토릭을 구사한 면이 있다고 보십니까?
한 - 글쎄요. 복합적일 텐데, 의식적으로 굴복했다기보다는 부지불식간에 감염됐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아요. 노무현씨가 후보 시절에 할 수 있던 얘기하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할 수 있는 얘기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부분은 인정을 하고, 좀 더 진보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고 하더라도 2003년도 상황에서라면 파병에 대해서, 노무현처럼 그렇게 화끈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밍기적밍기적하면서라도 보내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결정되는 방식을 보면 노무현의 캐릭터 문제도 있지만, 정부의 의사를 결정하는 그 요소요소에 이런 사람들이 들어 앉아 있고, 청와대 게시판에 허위 보고서 같은 것도 이상한 방식으로 올라가고 있고, 그런 걸 보면 이 사람들이 아주 뿌리 깊은 요소요소에 있다는 거죠. 이게 음모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주 자발적으로 각각의 자기 역할들을 해나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 - 옛날에는 그 사람들이 토론회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웃어넘길 수 있었는데요.
한 - 우리가 그 거대한 실체를 몰랐기 때문에 웃어넘겼던 거죠.
지 - 어떻게 보면 진보, 개혁 진영이 그쪽에 대해서 나이브한 생각을 했다고 봐야하는 건가요?
한 - 한국 사회가 자주의 요구를 했고, 그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성과를 거뒀죠. 소파 (SOFA) 문제도 제기가 됐고, 작전 지휘권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분야에서 문제 제기가 됐다는 말입니다. 미국도 옛날처럼 함부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그런 부분에서 성과가 있었는데, 그 밑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던 거죠. 주류라고 해야 할까요,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집단이 문제 제기 집단에 비해서 훨씬 더 빨리 변할 수 있다는 거죠. 정말 한국 사회는 말도 안되는 수구 꼴통이 있고, 실제 부딪히는 것은 그 사람들과 부딪히는데, 사회 변화 자체를 끌고 나가는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가령 신자유주의 같은 것은 순식간에 퍼져버린 것 아닙니까? 한미 관계에서도 전에는 한국과 미국이 별개로서, 한국은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이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예속의 굴레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하는 걸 가지고 싸워왔고, 그 부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잖아요.
하지만, 또 어느새 보면 한국이 예속된 것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는 거죠. 평화운동 내에도 ‘경계를 넘어’라는 단체가 있긴 하지만, 정말로 진보, 개혁, 평화 세력이 경계를 넘기 위해서 하는 노력과, 수단과 역량에 비해서 이 세력들이 경계를 뛰어넘는 것은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거예요. 우리는 물리적인 예속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싸웠고, 굉장히 중요한 성과를 거둬가고 있고, 여기서 우리 힘을 확인하는 이런 분위기였는데, 우리 발바닥 밑에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었던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죠.
저는 이것을 나이브한 생각으로 보지는 않아요. 나이브한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집단의 선도적인 자기 재생산 능력이라고 할까요. 상황을 자기들이 선택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능력,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역량을 벗어난, (이를테면 동구가 무너진다든지,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로 재편된다든지 하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역량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외적인 거대 변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세계사적인 변화 같은 것이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이라크 파병을 거치면서 표면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진보세력이 무엇을 반성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이런 부분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지 - 진보 세력이 어떤 부분을 반성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 - 사실 우리가 70년대, 80년대에 민중 생존권 얘기하고, 여공들의 저임금이라든가 사회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이게 정말 말이 되느냐?’, ‘정말 이건 말이 안된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하고 같이 고민을 했단 말이죠. 가령 제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면 1주일에 세 번 가면 한 달에 7만원 내지 8만원을 받았는데, 우리 또래의 여공들이 60시간을 일하고서 8~9만원을 받았단 말입니다. 스스로 ‘이건 말이 안되지 않느냐’고 했을 때, 부잣집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 행동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건 좀 문제가 있다, 어떻게든 해결이 되야지’하는 사회 전체의 그런 공감대는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회 맨 밑바닥 층의 기초 생활비를 주장하면 ‘빨갱이냐, 사회주의냐’고 대뜸 그러고, 저 사람들이 게으르고 능력 없어서 그렇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사회복지 확대를 주장하면 ‘일 안하고 그런데 들어가서 빼먹는 놈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민중 생존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훨씬 더 강퍅해진 그런 분위기이구요. 70~80년대 민중운동이 제기했던 여러 가지 의제들과 과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상대적인 역량, 영향력 이런 부분이 오히려 후퇴한 것이 아닌가,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다른 방식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보, 개혁 세력의 위기라는 부분에서 보면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랄까 그 문제도 심각하지만, 거기에서 초래된 것하고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더 근원적인 부분을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 - 삼성 얘기도 하셨지만,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자본과 그 시스템에 동의한다는 부분에서 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건희 회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 - 거기에 굴복했다고 할까요? 전의를 상실했다고 할까요?
지 - 미국에 대해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그런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진보, 개혁 세력이 경계에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조금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흐름이 있었는데, 그걸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그래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홍구, 박노자, 홍세화 이런 분들이 하는 얘기들을 훨씬 더 진실에 가깝고, 존중할만한 의견이라고 대중들이 받아들였는데, 지금 보면 뉴라이트들이 교과서에 ‘5.16 혁명’이라는 내용을 게재하는 상황이 되었지 않습니까? 몇 년 전의 분위기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흐름인 것 같은데요.
한 - 뉴라이트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홍세화, 박노자, 진중권, 강준만 등의 글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죠. 그 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다만 그 층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그것을 몰라서 분산되어 있다고 보고요. 그렇게 분산된 데는 노무현 정권의 책임이 굉장히 크고, 뉴라이트들이 나와서 깨춤추는 것은 조금 달리 분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 - 뉴라이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고, 각종 단체들을 만들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한 - 선거에 이길 것 같으니까 그렇죠.(웃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거고요. 우리가 지금 위기라고 하는데, 그 위기에 빠지게 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10년 동안을 보면 정말 한국 사회를 엄청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IMF 환란이 닥쳤는데, IMF라는 게 국제 금융자본 아닙니까? 이른바 시장 경제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집단인데, 그 집단이 들어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한국 재벌, 관료 문제 있다. 개혁해라’고 했는데, 국제금융자본의 대표가 들어와서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한국의 재벌들이 비시장적이었다는거죠. 이것을 글로벌 스탠다드, 시장에 맞게 하라는 건데, 시장에 맞게 하라는게 뭡니까?
가진 만큼만 지배하라는 거죠. 혁명을 한다는 건 가진 걸 뺏자는 거지만, 가진 만큼 지배하라는 것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요구한겁니다. 외환위기라는 게 서민들이 달러 빌려써서 온 게 아니잖아요. 재벌들이 빌려쓴 거고, 그걸 승인해준 게 관료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면서 이런 엄청난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한 재벌과 관료집단을 개혁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등장한 다음에 탈(脫) IMF 위기 강박관념에 빠져들었고, 재벌과 관료를 앞세워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한거 아닙니까? 사실은 책임을 물어야 될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렇게 되면서 개혁의 기회를 놓친 거예요.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하고 갔어야 하는 거죠. 그 기회를 놓치니까 재벌하고, 관료들이 뭘로 살아남았습니까?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전도사가 되어버린 것 아닙니까? 개혁의 대상이 자기가 개혁의 주체임을 자부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IMF 위기를 돌파했다’고 했는데요. 그걸 돌파한 것이 결국 IT 산업과 카드 경제 아닙니까? 그런데 IT 거품 빠지고, 카드빚으로 서민 경제 말아먹고 하니까 노무현 정권한테까지 부담으로서 남게 된 거죠. 노마크 찬스뿐만 아니라 국제 금융자본이 어시스트 해주는 그 기회를 날려버린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차례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가 탄핵입니다. 국민들이 ‘이건 아니잖아’하고 나선 것 아닙니까? 이회창 찍었던 사람까지도 집회에 나왔었죠. 그때 열린우리당 처음 만들었을 때 47석인가 그랬는데, 152석이 됐잖아요. 세상에 여당이 선거에서 세배 뻥튀기하는 예는 세계 선거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여당이 엄청난 실정을 했을 때 국민들이 정권을 심판해서 야당이 세배 뻥튀기 하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여당이 그런 예는 없을 겁니다. 17대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거기서 제일 먼저 했어야 할 것이 국가 보안법 폐지하고 이른바 4대 개혁입법과 민생이나 사회 복지 부분에서 반드시 했어야 할 것들을 ‘이것만은 반드시 하자’라는 어젠다를 갖고 ‘이게 17대 국회에서 나타난 민의’라고 밀어붙였어야 했습니다. 거기다 민주노동당 10석을 합쳐서 162석이면 뭘 못하겠습니까? 국회에서 그 시대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렇게 간다고 했어야 되는데, 상생이니 화해니 하는 것은 개혁을 해놓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했어야 할 일이죠.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국회의원이 됐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탄핵 때 기회를 놓치니까 2004년말에 가서 뒤늦게 천여 명이 길거리에 나가서 밥굶어가면서 싸우고도 국가 보안법도 폐지 못시킨 것 아닙니까? 두 차례 정말 다시 얻기 힘든 기회를 날려버렸으니까, 지금 우리가 위기에 빠진 것은 당연하죠.
지 - 농구 같은 경우도 보면 턴오버를 하고 나면 그걸 만회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무리한 파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참여정부도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보적 학자이기도 하지만 참여정부에 대해 초기에 많은 기대를 하셨고, 서울시장 선거 때는 강금실 후보의 지지 선언을 하기도 하셨는데요. 지금 봤을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 방향성 문제랄까요.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참 운이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정권 출범하자마자 이라크 문제가 터졌잖아요. 노무현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던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지지를 철회할 수 밖에 없는, 철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고요. 결과적으로 파병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고 보는데요. 정말 그 사람들의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줬거든요. 그건 미숙성과 캐릭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수용소 발언 같은 것은 해서는 안될 발언이었죠. 또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 쪽에서 열심히 싸웠던 변호사 중 한 분인데, 거기서 자기가 가진 경험을 절대화해서 대기업 노조를 귀족 노조처럼 얘기를 하고, 노동 운동 쪽하고 거리가 멀어지면서 결국 신자유주의에 정신없이 휘둘려버린 거죠. 관료 집단을 통제하지 못했고요. 그걸 통제하기 위해서는 당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열린우리당에 관료 출신들이 들어가서 당 분위기를 말아먹어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이 인사 문제에서 굉장히 한계를 보였다고 할까요. 그 부분은 김근태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지 -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잘못을 따지자면 김근태까지 올라가는 게 맞다. 김근태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의 주류, 그들이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제대로 된 정치적 구심점을 만들지 못했다. 이런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 - 참여정부의 실패는 물론 노무현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김근태에게도 절반 가까운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김근태 개인이 아니라 김근태로 대표되는 정치권 내의 민주화 운동 세력, 노무현도 물론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내에서 주류는 아니었거든요. 김근태로 대표되는 일정한 세력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집단이 노무현 정권이 등장했을 때 정말 힘을 합쳤어야 되는 거죠. 정권의 첫 번째 총리를 고건이 아니라 김근태가 맡았어야 합니다. 물론 노무현의 잘못도 있지만, 경선과정에서 두 사람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 부분에서는 김근태 선배가 잘못했다고 생각을 해요. 선거에서 졌으면 머리를 숙이고 옹립을 하고, 그 후로 최대한도의 지원을 했어야 하는 거죠. 이 정권이 자꾸 관료 집단에서 사람을 찾은 것은 민주화 운동 쪽에서 제대로 공급이 안된 측면도 있거든요. 물론 이 정권이 인사 문제를 부산 출신들이 좌지우지했다는 비판도 있고, 사람을 쓰는 폭이 너무 좁았던 면도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 내에서 영남 세력이라는 것이 TK, PK가 여당화되면서 제한되었는데, 그걸 중심으로만 하다보니까 민주화 운동 내부의 광범위한 세력들을 끌어안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실패에 대해서는 김근태 선배 쪽도 책임이 크죠. 노무현은 김근태를 끌어안지 못했고 김근태도 노무현에 대한 감정의 골을 지금까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요. 진보 개혁세력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줌이에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선거를 두 차례의 대선과 탄핵 직후의 총선까지 딱 세 번 이긴 겁니다. 한국 사회에 몇 십 년 동안 쌓여온 수구세력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를 이겼던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인 게 뭐냐 하면 대한민국에서 지방 의회 빼놓고 선출된 권력을 모두 장악한거예요. 선출되는 권력을 이른바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잡았고, 열린우리당의 내용을 보면 별로 개혁적이지 않지만, 어쨌든 비수구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겁니다. 선출된 권력이 상당한 정도의 민주화가 된 거예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죠. 선출되지 않는 권력은 여전히 남아 있고, 가장 대표적인게 사법부, 언론, 재벌, 교회, 사립학교 이런 건데요.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국회마저 빼앗기고 나니까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거죠.
그러니까 똘똘 뭉치게 되고, 그 다음에 3권 중 유일하게 남은 사법부가 전면에 나선 거 아닙니까? 헌법 재판소와 대법원이 경쟁적으로 국가보안법 합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병역법 합헌, 그리고 행정수도 문제를 가지고 관습헌법을 내세워 만루홈런을 치구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막아냈고, 2005년은 빼도 박도 못하는, 꽉 물려서 전진도 안되고 후퇴도 안되는 상태로 보냈단 말이죠. 그러다가 2006년도는 그 저울추가 저쪽 편에 실리기 시작한거죠. 경제가 안풀리면 부동산이라도 확실하게 잡았어야 하는데... 그 힘이 기울어져버리니까 부동산도 정신없이 뛰어버린 거 아닙니까? 이런 분위기가 되니까 뉴라이트들이, 사실은 뉴라이트도 아니죠, 수구세력내에 있는 각 분야의 기회주의적 이권배들이 먼저 깃발을 올리는 거죠. 뉴라이트가 이념을 내놓은 게 없잖아요.
이념적인 면에서 보면 뉴라이트들이 한국 사회에 뭘 제시한 게 없습니다. 그나마 내놓은 게 일본 극우파 것을 베낀 건데, 암만 베낄게 없어도 그렇지, 한국의 수구꼴통 세력들이 지적으로 빈곤해도 그렇지, 일본 극우파 베껴다가 자학사관 찾고, 건국의 아버지 찾고, 그 논리를 그대로 갖다가 한국 사회에 적용해서 이른바 좌익들이 일본적인 것을 망쳐놨다든지 하면서 일본 정신을 찾고, 일본의 영광을 위해서 싸웠던 그 사람들을 재평가하자는 얘기를 들여와서 여기서 한다는 거죠.
지 - 급할 때는 이재오 같은 사람한테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 아닙니까?(웃음)
한 - 이재오 뿐입니까? 이명박한테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웃음)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한국 보수가 성찰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탄핵 이후에 궁지에 물렸을 때 그런 성찰을 하면서 나왔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고요. 사실 뉴라이트의 핵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사파 떨거지들 아닙니까? 그 세력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아주 말썽을 많이 일으켰던 집단이죠. 자기들이 자칭 주사파고 주체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하는데, ‘주체사상의 발생과정’이라 할 수 있는 김일성 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공한 저같은 입장에서 볼 때, 아니, 그걸 전공 안했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볼 때 말도 안되는 점이 많아요.
그런데 그게 그 사람들의 문제로만 끝나면 괜찮은데, 문제는 실제 합리적인 보수세력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할 자리, 정말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 냉정하게 성찰하고 사회를 운영해본 경험 속에서 무엇이 잘못되는다는 것도 반성하면서 성장해가야 할 기회들을 이런 말도 안되는 뉴라이트들이 들어와서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결국 한국 보수 세력의 위기를 초래할 겁니다. 성찰의 결여에서 나오는 지적 빈곤이라고 할까요. 한국의 보수 세력이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거죠. 박정희만 자꾸 우려먹고. 제가 과거사위에 몸담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과거 청산은 진보적인 아젠다가 아닙니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가장 솔직하고 겸허하게 떠맡아야 될 문제가 과거 청산인데요. 안그렇습니까? ‘수사 기관에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면 안된다’는 얘기가 왜 진보적인 과제입니까?
한국의 보수 세력의 실패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보편적인 문제를 외면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수 세력이 설득력이 없는 거죠. 보수 세력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떻게 한국 사회를 책임지겠냐는 겁니다. 뉴라이트들이 나오니까 얘네들 앞세워서 인기를 끄는 상황이 수구 세력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는 상황 같겠지만, 사실은 한국 사회의 보수 세력이 거듭날 수 있는 그 기회를 저쪽도 흘려보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골을 못넣었지만, 저쪽도 골을 못넣고 있는 거죠.
지 - 국민들 입장에서는 개혁 세력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다보니까 따져 보면 전혀 새로운 내용이 없는 뉴라이트에게 ‘뭔가 새로운 것이 있지 않겠느냐’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한 -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신드롬도 박정희의 군사 독재를 지지하는 게 아니잖아요. 엄청나게 부풀려져 있지만, 경제신화에 대한 지지죠. 사실은 외환위기로 다 들어먹은 거지만. 이명박에 대한 기대는 노무현 정권이 경제 문제를 푸는데서 무능했기 때문에 생긴 거죠. 경기는 부양시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동산이라도 잡았으면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큰 소리 쳐놓고, 오히려 강남 투기꾼들하고의 기 싸움에서 져버린 것 아닙니까?
완패를 해버리고 나니까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뛰고, 사회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민주다, 개혁이다’ 얘기를 해봐야, 국민들은 ‘민주, 개혁이 내 집 마련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라고 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아무런 메시지를 줄 수 없으니까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하고 나서 오히려 한국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해진 것 아니냐’라고 하는 그 위기 상황 속에서 자연히 선택지가 저쪽으로 넘어가버린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 - 그런 면에서 이명박 캠프 쪽에서는 이명박의 높은 지지가 실체가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지난번 대선 때의 이회창 대세론과도 내용이 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거든요.
한 - 이회창 신드롬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 싶어요. 어떤 면에서는 이회창씨 같은 분이 차라리 김대중 정권의 후보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있었거든요. 자식 병역비리 때문에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의 집권 세력 내지는 주류라고 하는 집단 내에 이회창 같은 사람도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게 한국의 집권 세력의 비극이라면 비극일지 모르지만, 대법원 판사 시절에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고, 민변 변호사들도 그걸 가지고 공부를 하기도 했고요. 그 당시에 이회창씨가 했었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고 봐요. 총리나 감사원장 때 줬던 좋은 이미지도 있고요. 한국 사회가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반민주, 군사독재 정권의 잔재를 씻어 나가는데서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보수라고 할까요.
나름대로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그쪽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일정한 역할을 해주는 상황을 한국사회가 거치는 것도 길게 보면 좋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회창은 그런 역할들을 못했고, 수구세력 품에 안겼고, 그러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좋은 부분마저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더럽혀진 측면이 있죠. 이명박은 허상일지언정 한국 경제의 성공을 대표하는 그런 신화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실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 자체는 실체라고 봅니다. 박근혜도 실체는 있죠. 하지만 박근혜는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을 겁니다. 사학법이든 뭐든 자기 추종 세력 내부의 결집이랄까, 결속이랄까, 그걸 끌어내는 데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전혀 주지 못하니까 이명박에게 지난 추석을 계기로 밀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지 - 참여정부가 보수 세력들하고 정책적인 큰 차별을 두지 못하니까 자꾸 말로 그걸 때우려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 글쎄요. 못 둔 부분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구정권에서 못했던 부분을 해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성에 안차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정부가 나서서 감군 계획을 발표한 것은 처음입니다. 작전 지휘권 환수 역시 마찬가지인데, 물론 이회창이 집권했으면 그거 안할 겁니까? 성우회니 펄펄 뛰는데, 자기들 집권 했으면 안할 겁니까? 자기들 집권했어도 할 거고, 그게 노태우 정권 때의 공약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평통에서 회의를 할 때 굉장히 격앙이 되서 얘기하기도 했지만, 사실 작전지휘권 환수 문제는 80년대부터 나왔던 얘기 아닙니까? 그런 부분을 실제로 해나가는 것, 그거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될 부분도 있는 거죠. 솔직히 노무현 정권에서 제일 잘한거라고 할까요, 그나마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거사 청산 문제인데, 그거는 노무현이 돌파했지, 당이 한건 아니거든요. 국가보안법 문제도 그렇구요.
나중에 다른 평가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나마 이런 과거사 청산 작업이 벌어진 것도 2004년 8.15 연설 때 대통령이 과거 청산 문제를 치고 나갔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당이 노무현보다 더 책임을 져야될 부분이 많지 않느냐 하는 거죠. 국정원 과거사위를 만든 것 같은 것도 잘한 거죠. 물론 들어와서 일을 하다보니까 한계도 많고, 정말 성질 버리고 있지만,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해서 행정부 내에 스스로 그 기구를 만들게 한 것은 잘한 거라고 봅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노무현이 독박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요. 저는 노사모도 아니고, 노무현에 대해서 날선 비판을 몇 차례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비판을 더 받아야 할 것은 열린우리당이고, 386들이고, 김근태로 대표되는 평화개혁세력이라고 봅니다. 그 집단이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재선을 할 것인가’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노무현은 재선 걱정을 안하니까.(웃음) 물론 그 추종 세력들, 영남 세력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보면 한심한 측면도 있지만, 노무현한테만 독박 씌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 - 황우석 사태와 인혁당 사건이 합리적 의심을 가로막는 폭력이라는 면에서 같은 것이며, 그것이 국가보안법의 본질이라고 하셨는데요. 지금 어떻게 보면 국민들 마음속에서 국가주의가 예전보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 - 인혁당 사건이 국가보안법의 심리적 기제가 작용했다면, 황우석 사태는 ‘국익보안법’이 작용을 한거죠. 예전에는 국가주의가 동원과 폭력, 군사주의와 반공을 통해서 작동을 했다면, 이제는 신자유주의와 국익 지상주의를 통해서 작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빨갱이라고 하면 무조건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듯이 황우석 사태에서도 그랬잖아요. 된다면 참 좋은 거죠. 저게 된다면 참 좋은 거지만, 과학자들조차도 거기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잖아요. 과학자로서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너무나 많이 하고 다녔구요. 거기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 였잖아요. 국가보안법 시절에 ‘아무개는 빨갱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 편드는 사람이 더 나쁜 놈 취급을 받았었는데, 그거랑 똑같은 거죠.
지 - 옛날에 국가가 ‘저 사람 빨갱이야’라고 했을 때 속으로는 ‘아닐 수도 있어’라고 의심했던 상황보다, 대중 스스로가 ‘저 사람은 국익에 손상되는 매국노야. 처벌해야 돼’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한 - 우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죠. 인혁당 사건도 겪고, 수많은 전략 간첩 사건을 겪고,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그런 게 알려지니까 조금씩 나아진 건데요. 빨갱이라면 펄펄 뛰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잖아요. 그런데 국익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사기를 당해본 적이 없잖아요. 저는 황우석 사태가 그런 면에서는 국민들에게 ‘국익보안법의 마술에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는 교육적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어떤 사기꾼이 나와서 줄기 세포가 아니라 우주 어쩌고 한다고 해도 국민들이 거기에 쏠려갈 것 같지는 않거든요. 언론이고, 지식인 사회가 ‘우리 황우석 사태 때 보지 않았느냐? 검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는 되었다고 봅니다. 그 사건만 놓고 보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럴듯한 얘기를 무조건 믿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할까요.
빨갱이 문제라고 하면 인혁당 사건이나 조작간첩 사건 같은 걸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을 기회가 있었지만, 국익 문제로는 이런 집단 최면이 처음이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런 것들을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하고 배워나가는 건데요. 황우석 사태 같은 게 애초에 벌어질 수 있었던 심리상태나 코드가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는 거잖아요. 국가보안법 체제에 의해서 이미 만들어져있는 프로그램에 반공 대신에 국익이라고만 집어넣어서 그것에 의해서 작동하게끔 코드를 살짝 바꿨었던 거죠. 우리가 거기에 굉장히 쉽게 노출되어 있었던 거구요.
지 - 선생님께서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 풍토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희망적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한 -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서 그런 교훈이라도 남기지 못하면, 그건 말이 안되는 거니까.
지 - 파병에 대해서도 베트남에 파병할때는 민망함을 알았는데, 지금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통과되고 있다고 개탄하셨습니다. 실제로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반대하는 척하라는 지시를 내렸었고, 자료를 수집하던 차지철이 너무 극렬하게 반대해서 박정희가 주의를 줬었다는 웃지 못 할 일화가 소개된 적도 있는데요.
한 - 차지철한테 시킨 것은 쇼죠. 미국과 교섭을 할 때 국회가 너무 쉽게 파명을 결정하면미국한테 말발이 안서니까 차지철한테 그런 쇼를 시켰던 거구요. 베트남에 파병을 할 때도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하는 그런 부분,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파병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 정부 관료들도 민망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1964년~65년 아닙니까? 우리가 얼마나 못 살 때입니까? 정말 세계에서 최빈국 대열에 들어있었던 때인데요. 저도 깜짝 놀라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는데, 누가 그 얘기를 했느냐 하면 유창순이라고 나중에 롯데 회장을 하면서 전경련 회장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분이예요. 당시 [사상계] 좌담에서 국익 얘기가 나왔는데, ‘6.25때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한미동맹도 강화해야 되고,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참전을 해야 되고’하는 얘기가 나오다가 다른 화제로 넘어 갔다가 다시 국익 얘기가 나오니까 그 분이 무슨 얘기를 했냐 하면 ‘아까는 제가 말씀을 안드렸지만, 여기 군대에 보내면 항만 공사도 따고, 도로공사도 따고 해서 생기는 게 좀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는 민망해서 얘기를 못했습니다’라고 했거든요.
그때 유창순씨가 경제기획원 장관 그만둔지 얼마 안되었을 땐데, 관료 출신의 경제인조차도 남의 전쟁에 가서 돈 벌어오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40년이 흘러서 지금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 아닙니까? 교육 수준은 그때하고 비교해서 어마어마하게 높아졌습니다. 그때는 적극적 파병론자도 그렇게 민망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파병 반대론자도 국익 얘기만 나오면 꼬리를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진보 진영이 반성을 해야 될 부분이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진보의 어젠다에 안 들어가 있잖아요. 지금 진보의 어젠다는 정권 문제를 중심으로만 자꾸 따지는 것 같은데요. 물론 정권도 저쪽에 내주면 안되겠지만, 우리가 한국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양극화 문제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가, 물론 저는 전공이 그쪽이 아니라서 양극화 문제 보다는 국가 폭력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얘기를 많이 했지만, 사회에서 빈곤 문제, 민중 생존권 문제를 얘기하기가 70년대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반미 문제 같은 것도 훨씬 더 강한 벽 앞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에는 재수 없어서 감옥 가는 게 문제였지, 대중을 설득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적어도 우리가 큰 한국 사회의 방향성과 관련되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어려워진 측면을 진보 세력이 깊이 있게 반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성과 아울러 어떻게 이렇게 됐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어떻게 잡아야할 건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고요.
지 - 박정희 시절 조차도 협상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쇼를 했는데요. 이라크전 파병할 때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대하는 목소리들에 대해서 정권을 흔든다고 섭섭해 했지 않습니까?
한 - 탄핵하기도 전에 쓴건데, 정말 누가 섭섭해야 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누가 할 소린데, 배신감을 느꼈으면 누가 느꼈어야 되는데’라는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었죠.
지 - ‘어쩔 수 없이 보내야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상처받은 것을 자꾸 인식 시키고, 진보 진영에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자꾸 되갚아주려는 심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감정의 골들이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한 - 탄핵 문제가 그 골을 메꿀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 아닙니까? 탄핵하고 겹치니까 낮에는 이라크전 파병 반대 집회 가서 노무현 정권 규탄하고, 저녁때는 탄핵 반대 촛불 집회 갔잖아요.(웃음)
지 - ‘인류 역사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나라’라는 지적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조폭세계에서 누가 바짓가랑이에 회칼 차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별 효과가 없다. 실제로 수틀리면 진짜로 휘두르는 놈이라고 공인되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셨는데, 미국이 그런 면에서 공인받은 나라 아닙니까?(웃음) 그것 하고 관련해서 북한의 핵 문제를 바라봐야 될 것 같은데요. 북한 핵실험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 - 평화운동 단체에 몸담고 있는데 저야 당연히 반핵이죠. 반핵인데, 여기서 반핵이라고 얘기하면 일반적인 반핵이어야죠. 반북핵만을 얘기하는 것은 기회주의자들이고, 미국 핵무기까지 반대를 하는, 지구상에서 핵무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이어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요. 한국의 일부 통일운동 세력에서 북핵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에도 반대합니다. 그것도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이 어차피 우리 꺼다하는 입장에서부터, ‘북한만 욕하면 어떻게 하느냐’까지, 북한만 욕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은 당연히 평화운동 세력과 겹치죠. 그렇다고 핵무기가 대안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고요. 통일 운동 세력 내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좀 더 해야 되는 것 아니냐’하는 건데, 거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평화운동 세력도 입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지 - 미국이 일본에 핵을 투하함으로써 우리가 해방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우리가 핵에 대한 불감증이 심하다고 지적하셨는데요.
한 -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 국가라고 얘기하지만, 일본민족이 세계 유일의 피폭 민족은 아니예요. 국가로서는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지만요. 한국 사람이 피폭당해 죽은 사람이 히로시마 3만, 나가사키 1만 해서 모두 4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서 이걸 안가르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가 정말 울퉁불퉁했지만, 하루에 3만 명이 죽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4만 명이 죽었는데, 이걸 역사 시간에 안가르친다니까요. 왜냐하면 우리한테 수십 년 동안 미군의 핵무기가 있었잖습니까? 핵무기가 이렇게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면 안되는 거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반도의 핵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려면 그런 문제를 얘기를 해야죠. 57년도에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니까 일본에 있던 핵무기가 한국으로 이사오잖아요.
그래서 91년까지 적게는 600기, 많게는 1000기 이상의 핵무기가 한반도에 주둔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얘기를 안해왔으면서 북한이 최근에 개발했던 한 발인지, 몇 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만 문제를 삼는 건 말도 안되죠.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게끔 몰고 간 과정 자체는 그것대로 미국을 비판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북핵을 용인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 - 어쨌든 우리 입장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데요. 북한은 ‘미국이 회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위협을 한다면 우리도 회칼을 차야 되는 거 아니냐?’는 입장으로 개발한 것 아닙니까?
한 - 저는 핵무기에 대해서 반대지만,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면 북한 입장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단기적으로 보면 분명히 남는 장사였거든요. 핵무기 개발 안했으면 북미 대화가 성사가 되지도 않았을 거고,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텐데, 만들어놓으니까 6자 회담도 그렇고, 경제봉쇄도 뚫리게 되는 거고, 북한 입장에서는 94년도에 제네바 협의를 통해 ‘핵개발 포기할게’라고 했는데, 얻은 게 없었잖아요. 북쪽 입장에서 핵개발을 강행하자는 목소리가 자꾸 만들어지는 환경이 조성이 된 거죠. 이때 남쪽 입장에서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평화운동 세력이고, 정부고 간에 북쪽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것을 포괄적인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문제와 맞물려서 고민해야죠. 우리가 6.15 공동선언을 했기 때문에 남쪽이 비로소 활동의 여지가 넓어지는 건데, 남쪽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메시지는 ‘미국이 함부로 북한 공격을 못하게 하겠다’는 건데요.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남한이 북한을 껴안고 있으면 되는 거죠. 또 하나, 남한의 대통령으로서 해야 될 것이 ‘미국이 혹시라도 북한을 때릴지는 몰라도 남쪽에 있는 주한 미군은 총알 하나 동원될 수 없다. 그건 내가 책임지고 못하게 한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미군기지 나가야 된다’는 보장을 하고, 북한을 껴안아야 하는 거죠. 그 상황이 이라크하고 다른 건데, 죽어도 북한을 못때리게 만드는 상황은 국제 사회에서 남한이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남북 군사 교류를 하고, 남북 감군을 하고, 남북간의 군축회의를 하고 국군 장성이 북에 가서 북한이 감군 제대로 하는지를 검열하고, 인민군 장성이 남쪽에 와서 또 남쪽은 감군 잘하는지 검열하는 상황이라면 미국이 아무리 세계 깡패라고 해도 폭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정부나 시민운동 단체가 미국의 정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하여금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거든요. 국가 이름에 같이 코리아라고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남쪽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굉장히 많죠. 우리가 원칙적인 입장에서 ‘핵무기 절대 안돼’라는 이야기도 해야겠지만, ‘그러면 북한이 핵무기를 놓아도 되는 상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한국 정부를 추동을 하고, 한국 시민 사회를 추동을 하고, 미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압력을 가하고, 미국이 칼을 못휘두르는 그런 조건을 남북이 같이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지 -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라는 글을 통해 한미 FTA 추진파의 ‘쇄국망국론’을 비판하셨는데요. 지금 2007년 3월 체결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 중인데,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노무현 정부가 양극화 해소 이야기를 하면서 정책 부분에서는 반대로 가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은데요.
한 - 한미FTA는 잘하면 막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용이 워낙 황당하고, 노무현 정권이 워낙 준비 없이 했기 때문에 우리 시민 사회가 아무리 무기력하다고 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떻게 이렇게 준비 없이 FTA를 추진했냐 싶을 정도예요. 정태인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결과가 저렇게 어마어마한데, 여기저기 암초와 폭탄 투성이니까 한 군데서만 터져도 대선 이전까지는 막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 이후 어떻게 될지는 대선 결과 등의 변수가 많아서 말씀드리기 어렵겠지만요.
지 - 정부는 한미FTA를 2007년 3월 체결을 목표로 하고 협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한 - 노 정권의 희망 사항이겠죠. 저는 그거보다도 왜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를 선택했나가 궁금해요. 저는 한겨레 강연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미국 간첩은 어떻게 잡나요? 어디다 신고를 하나요?’라고 했는데, 미국 간첩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웃음) 형법의 간첩조항은 적국으로 규정이 되어 있고, 국가보안법은 반국가 단체인데, 미국은 적국도 아니고, 반국가 단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미국은 로버트김을 한국 간첩으로 처벌을 했잖아요. 우리는 한국의 국익을, 최고 정보를, 그것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 결정을 머리 검은 미국인들이 들어와서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처벌은 고사하고, 적발 내지는 위기의식조차도 없는 거죠. 이라크 파병을 보면서 처음에 느낀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 미국 간첩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그냥 간첩 수준이 아니예요.(웃음) 간첩단도 아니고, 간첩이라고 하면 공작금도 받고, 지령도 받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지령 없이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수준, 그러니까 간첩 수준을 넘어섰다고 봤기 때문에 머리 검은 미국인이라고 표현하는 건데요. 사실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지 - 그 사람들이 그렇게 소신을 가지고 하는 이유나 동력은 뭐라고 보십니까?
한 - 이완용도 소신이 컸죠. 그 사람이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나라 팔아먹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송병준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요.(웃음) 전 노무현 대통령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제발 역사의 법정에 불려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노무현 정권의 그나마 업적이 과거 청산이고, 제가 과거 청산을 일선에서 하고 있는 입장에서 대통령이 과거청산에 조금 더 힘을 실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당연히 있죠. 과거 청산을 하면서 대연정 제안 같은 때는 배신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낄 때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그걸 떠나서 크게 볼 때 노무현 정부의 최고 업적은 과거 청산입니다. 그런 노무현이 나중에 과거 청산의 법정에 불려나오면 안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거나, 노동 문제 같은 것은 역사의 평가로서 비판을 받고 말겠지만, 한미FTA 문제는 이건 청문회 정도가 아니라 과거 청산 법정이 열려야할 사안입니다.
지 -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보세요?
한 - 진짜 모르겠어요. 진짜 궁금해요. 그건 측근이었던 정태인도 모른다고 하잖아요.(웃음)
지 - 국가주의에 관련해서 국립묘지도 상당히 상징적인 공간일 텐데요. 죽어서도 계급적으로 차별받는 것을 보면서 ‘국립묘지를 보면 숨이 막힌다’는 글도 쓰셨는데요. “‘뼈에 무슨 이념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바꾼 독재자 프랑코 총통을 부러워해야 하는가?”라는 역설적인 이야기까지 하셨지 않습니까? 세월만 해도 한참을 지났는데, ‘전쟁을 통해서 희생된 사람들을 한 공간에서 추모하자’는 주장을 하면 지금도 난리가 날 데요.
한 - 난리가 나겠죠. 과거 청산 얘기하면 기념 공원 이런 얘기 나오는데, 복잡하게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공원 만들어놓고 하루에 입장객 한명, 두명 그러면 만들 이유 없거든요. 여기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과 조그만 위령비만 있으면 되는 거죠. 대신 국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쟁박물관 - 전쟁기념관이 아니라 - 같은데 추모공간이 같이 들어가야죠. 거기는 전쟁 때 싸운 군인들만이 아니라 군인들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까지를 다 같이 역사 속에서 기억을 하고, ‘다시는 이런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 거구요, 국립묘지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 중의 하나가 ‘군대가서 자살한 사람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느냐, 없느냐’인데, 지금 못 묻히거든요.
자살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상 문제가 아니라 군대에서의 가혹 행위라든가 하는 것과 대개는 겹치는 것이라 딱 자르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국가 폭력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왜 국립묘지에 가면 안되는가, 왜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으로까지 발전하면 안되는가 하는 겁니다. 굳이 국립묘지라는 시스템을 운영한다면 말이죠. 국립묘지는 사실은 자꾸 전쟁을 일으키는 시스템이거든요. 근대국가가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국립묘지입니다. 근대국가의 발전사를 볼 때 ‘너희의 죽음이 개죽임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한 거죠. 프랑코 총통의 얘기를 쓰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 비전향 장기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파주 보광사라는 곳이 있는데요. 추모비도 세우고 그랬는데, 그걸 다 때려부순 거 아닙니까? 죽어서도 잠들 수 없는 거죠. 문근영씨 외할아버지 비석까지 있었는데 다 때려부셨죠. 부관참시 문화라고나 할까, 포용을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는 거죠. 사실 스페인의 로스 카이도스 계곡은 프랑코가 처음에 삼청교육대처럼 지은 거거든요. 문제가 많은 곳인데요. 공화군 포로들을 잡아다가 강제노역을 시켜 지은 건데,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 자기도 나름대로 사회 통합이 필요하니까 그쪽을 끌어안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스페인 내전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을 묻는 곳으로 만든 겁니다. 자기도 거기 묻혔구요. 한국의 수구 세력은 프랑코만한 아량도 없는 거죠. 그 부분을 역설적으로 표현을 한 겁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가져온 곳 : http://blog.naver.com/pungdang2?Redirect=Log&logNo=15001431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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