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인터뷰(2) - 강풀의 26년을 보고 부끄러웠다.
(1)부에서 계속됩니다.
1부 내용에서는 '미국 간첩은 어떻게 잡아야 하나?'하는 문제 설정과 하루에 한국 사람이 수만명 죽은 원폭 피해에 대해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2부에서는 '강풀의 26년'에 빗대어 과거사 청산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너무 처벌을 빨리 포기한 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셨습니다. 처벌과 화해가 꼭 대립되는 개념만은 아니라며,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용서 없이 화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읽어 보시고 같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 - 2005년말 서정갑씨가 대표로 있는 보수적인 성향의 국민행동본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북인사 명단을 발표했는데, 거기 교수님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한 20명 정도 발표했는데, 학자로서 한국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정치인들과 함께 거기에 들었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한 - 영향력보다도 가령 전투적인 글쓰기라고 할까요? 박노자 선생하고 비교한다면 박노자 선생은 운동권 내부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까 그런 걸 많이 했다면, 저는 그런 쪽보다는 특히 국가 폭력과 관련된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저쪽 입장에서는 갑갑했겠죠. 또 하나는 우파 쪽에서 제대로 된 서평이나 대응이 하나도 없어요. 내심 조선일보 같은데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하고 있는 일의 80-90%가 사실은 보수적인 어젠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난 환경도 그렇고, 자란 환경도 그렇고요. 과거 청산 문제 같은 것도 보수적인 어젠다이고, 꼭 진보적이어야만 평화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베트남 문제에 대한 반성도 마찬가지죠. 양심적 병역 거부도 그렇고요. 군대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를 많이 했지만, 한국의 보수 세력이 한국 사회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풀어야 될 문제를 많이 제기했는데, 사실은 문익환 목사님, 장준하 선생 같이 한국의 진보 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진보 세력이 된 거 아닙니까?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한국의 보수세력이 진지하게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는데, 다만 나오는 게 그런 것 밖에 없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저도 갑갑하구요. 수구세력 입장에서 보면 내 글이 대략 난감, 그런 거겠죠. 주로 민감한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문제 제기를 하고, 저쪽에 비판할 거 비판하고, 조롱할 거 조롱하고, 폭로할 거 폭로하고 하다 보니까 굉장히 이쁨을 받는 처지가 된 것 같아요.(웃음)
지 - 지금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글들도 점점 더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수구 세력들에 대한 적개심이 글에 점점 더 묻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웃음)
한 - 과거사위 하면서 성질 버려서 그런 얘기를 좀 듣는 것 같은데요.(웃음) 그거보다도 현실적으로 내가 너무 바빠지면서 글을 준비할 시간이 적어진 것도 있고, 그 다음에 국가 보안법 문제라든지 거기에 대해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선택의 범위가 좁아진 것도 있죠. 그리고 과거사위가 바빠지니까, 그 전에는 연구자로서 이 자료, 저 자료를 마음껏 보다가 많은 사건들 중에서 자유롭게 잡아서 쓸 수 있지만, 지금은 맨날 보고 있는 것이 과거사 자료들인데 조사 중인 사건 가지고는 쓸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자꾸 현실적인 문제 같은 게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재오, 김문수 같은 것은 별로 자료 조사 안하고 썼단 말이에요. 잡지사에서도 한번 써달라고 요구했지만, 사실 마감 때가 됐는데 막막하고, 내가 겪은 것, 내가 하고 있는 것과 연관된 걸 쓴 거죠. 국가보안법 시리즈 같은 경우는 평화 박물관에서 전시를 했거든요. 늘 해오던 거지만 전시회 컨셉에 맞춰서도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고, 바빠지면서 그렇게 된 거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구요.
지 - 학자로서 공익 근무를 하는 것이 손실일 수 있지 않습니까? 박원순 변호사님을 만났을 때도 ‘사실 저는 글만 쓰고 살고 싶어요’라고 하시더라구요.
한 - 박원순 변호사는 대단해요. 야만 시대의 기록 정리해놓은 거 보니까.(웃음) 공익 근무 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 학교에 매일 나가지는 않았는데, 안식년에 매일 아침 국정원 과거사위 출근해서 사무실 지키고 앉아 있으니까 답답하기는 한데요. 제가 연구실만 지키고 있었으면 대한민국사 같은 글은 죽었다 깨나도 안 나왔을 겁니다. 인권 평화 단체에서 일하고 과거사위 일하면서 자료만 읽어서는 못 보는 것을 많이 보게 됐죠. 그런 것을 읽어내는 눈이라고 할까, 그런 부분들은 길바닥 생활 내지는 공익 근무를 하면서 얻은 부분들이 있는데요. 다만 욕심이라면 역사 이야기는 40매 짜리 글인데, 그런 것 말고, 똑같은 주제라고 하더라도 1,000매 짜리 글, 호흡이 긴 글을 제대로 썼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사>에 쓴 것을 보면 누군가는 연구를 해야 될 주제, 한국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주제들도 많은데요. 특히 호떡집에 불 난 사연 같은 것은 옛날부터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못쓰고 있는데, 시간을 내서 그런 것들을 쓸 수 있었으면 싶은데, 모르겠어요.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 내에서 일정한 역할 분담이라고 할까, 공익 근무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서 대신 시키고, 저도 좀 들어가서 논문 좀 쓰다가 다시 나오고 하는 순환 보직을 해야죠.(웃음)
지 - 인문학의 위기 얘기하면서 대중하고 소통을 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학계에서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지 않습니까?
한 - 많이 있죠. 섭섭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제가 말하기는 좀 그렇고요. 다만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해서는 사실은 한국이 과도하게 쏠린 부분도 있어요. 가령 영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한국에 어쩌면 영국만큼 많을지 몰라요. 불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프랑스 다음으로 많을 겁니다. 과도하게 팽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축소가 되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해요. 사실 한국 사회의 대중이 17세기 프랑스 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 다양한 것들을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면 되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인문 학자들이 ‘대중 독자들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발언을 하느냐,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날 것이냐’를 고민해야죠. 저도 청소년들에게 역사 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이냐 하는 것을 고민하는데요.
동북 공정 나오고 해서 역사 교육을 강화한다고 하면 겁이 나요. 이 입시 제도 하에서 밑줄 쫙 하는 암기 과목으로서,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국책 시험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렇게만 귀결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 위기를 더 부추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인문학이 역사면 역사, 문학이면 문학으로 동시대의 고민을 함께 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 거죠. 청소년들한테 역사 이야기를 한다면, <한겨레21>에 역사 이야기를 쓴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은데요. 애들한테 다가간다고 해서 글자 좀 크고, 사진 좀 많이 들어가고, 용어 풀이하는 박스가 들어가고, 그런 책 말고 애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두발, 학교 생활, 체벌, 입시, 이성 교제, 영어 공부 이런 것을 좀 역사적으로 풀어줘서 역사에 대해서 아이들이 흥미를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야 인문학적인 교양이 힘을 갖고, 애들 입장에서 제일 흥미 있는 과제를 인문 학자들이 다가가서 설명을 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문학 하는 사람들은 문학 하는 사람들대로, 철학 하는 사람들은 철학 하는 사람들대로, 인권 문제는 인권 문제대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문학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중과 만나려는 노력을 해야 되는데, 한국 인문학계는 그런 노력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지 - 제가 볼 때는 온실 속의 화초하고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는 똑같은 행위인데, 자기들이 대중들을 감동시킬만한 실력과 에너지가 없으니까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린 대중들이 듣는 것과 다른 차원의 음악을 하는 거야’라고 하는데, 실제로 음악을 하는 행위 자체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홍구 선생님이나 박노자 선생님 하시는 것 같은 작업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 성공회대에서는 잘 인정을 해줘서 다행이죠.(웃음)
지 - 그런데 수염이 왜 기르고 계신가요?
한 - 2월 달에 정수일 선생님 모시고 실크로드를 갔다 왔는데요. 그때 10여일 갔다 오면서 귀찮으니까 안 깎았는데, 남자들은 다 한번쯤 길러보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그래서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국정원 상근 시작할 때였어요. 그때 받는 스트레스 겸해서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겠다고 해서 기른 건데, 특별한 뜻을 가지고 했던 것은 아니고, 심심한데 한번 길러볼까 한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표해주고, 질문도 많이 하고, 깎으라는 압력도 많고, 그러니까 더 길러보고 싶더라고요.(웃음) 다행히 조희연 선생님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가 아니라는 압박을 받고 깎아 버렸거든요. ‘조희연 선생보다 훨씬 낫다’고 해서 기르고 있습니다.(웃음)
지 - 과거사위 하시면서 어떤 것 때문에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으세요?
한 - 여러 가지죠. 여태까지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가는 사람들하고 같이 일했는데요. 지금은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하고 일을 해야 되고요. 관료 조직이고, 상층부는 과거 청산에 필요성이나 대의에 대해서 공감을 하지만, 젊은 층이 오히려 생각이나 태도가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과거 일에 대해서 잘 모르구요. 고급 간부 되는 분들은 과거에 잘못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넘어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입사한 지 10년쯤 된 사람들은 국정원이 많이 변화한 다음에 들어왔으니까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부딪히는 게 굉장히 많죠.
지 - 과거 청산 작업을 하시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어떤 건가요?
한 - 과거 청산과 관련해서 스트레스라면 스트레스랄까 그런 게 있는데요. 5월 달에 강풀의 26년이라는 만화가 있었죠. 저는 그 만화를 다 못 봤는데요. 처음에 시놉시스 들었을 때는 좀 황당하더라고요. 시민들이 전두환을 테러한다는 게 만화가 될까 싶었는데, 이야기 풀어가는 솜씨가 대단하더라구요. 솜씨만이 아니라 진짜 과거 청산의 핵심적인 문제를 건드린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충격을 받아서 5-6회 정도 보고 더 못 봤어요. 덜덜 떨려서. 앞으로 언젠가는 봐야겠지만, 아직까지 못보고 있는 숙제인데요. 6회까지인가 밖에 못 봤는데, 굉장히 많은 걸 생각하고, 많은 걸 반성하게 됐어요. 강풀의 그 만화가 인터넷상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라고요. 부끄러움과 반가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우리가 과거 청산을 가지고 위원회를 숱하게 만들었잖아요. 과거 청산 관련해서 정부가 만든 위원회가 스무 개에 가깝습니다. 거기서 월급 받는 사람도 700~800명은 될 겁니다.
강풀 만화를 보면서 참 부끄러웠던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많은 인원이 달려들었고, 저는 안식년까지 포기하면서 상근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지나 놓고 보니까 우리가 과거 청산과 관련해서 진실된 고백을 한 건이라도 끌어냈냐는 겁니다.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고백 안 한 놈을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감옥에라도 한 놈을 보냈느냐, 하면 그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두환이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나 29만원밖에 없어’하고 다니는 거거든요. 국정원 과거사위가 과거사 위원회 중에서 수색대랄까 척후병 역할을 하면서 진로를 개척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요. 제 나름대로는 지금 평화 박물관 사업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못하고 거기 나가 있으니까 갑갑한 게 많은데요. 저는 나름대로 죽어라고 하고 있는데 결과를 보면 그렇단 말이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강풀 같은 작가가 만화를 그려서 사람들한테 다시 한번 묻는 거잖아요.
과거 청산을 하려고 하면 전두환 같은 사람이 떵떵거리고 살면 안 된다는 문제를 그 만화는 제기하는 거잖아요. 광주에서 적어도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여태까지 아무한테도 책임을 못 묻는다는 거, 발포 명령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는 거,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강풀이 우리한테 중요한 문제를 던진 겁니다. 공적인 처벌이 좌절된 지점에서 보복의 문제를 던진 거예요. 과거 청산 문제가 시작될 때 우리가 힘이 없기도 했지만, 처벌 문제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거예요. 꼭 누굴 감옥 보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처벌하려는 거 아니거든.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너무 쉽게 했단 말이죠. 이거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면, 남아공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진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면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놈이 자신의 악행을 그냥 고백을 하겠습니까?
처벌이 있기 때문에 고백을 하는 거죠. 진실 규명과 처벌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고,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거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업을 해보니까 처벌 없이 무슨 진실을 밝히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 이 사람 고문 했지’, ‘나, 안 했는데요’,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아프냐? 니가 했잖아’, ‘내가 아니라 저 놈이 했는데요’, 그러면 저 놈을 붙잡아서 ‘니가 했지?’, 그러면 ‘사실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위에서 시킨 건데요’하면서 진실이 밝혀지는 건데, 어떤 미친놈이 그런 상황도 아닌데서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벌이 안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되는 개념이지, 사회가 책임져야 될 사람을 책임지게 하지 못 했을 때 그 가족들은, 남는 당사자들은 그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가 살인자의 유가족들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보복하지 마라. 대신 사회가 처벌 해준다’고 하니까 비로소 막을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걸 포기해놓고 뭘 한다는 게 말이 안되죠. 전에는 ‘보복, 말이 되나’하고 과거 청산 일선에 있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는데요. 강풀의 26년을 보니까 너무나 말이 되는 얘기였다는 거죠. 이것은 그대로 두면 안되는 거고, 이게 정의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전두환에게 묻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문제 때문에 아픈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해?’라고 일반 시민들에게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조작 의혹을 갖는 간첩 사건을 조사하면서 (내가 간첩 문제를 많이 다뤘다고 생각했고, 피해자들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깊이 들어가면서 거의 종교 체험에 가까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있어요. 화해라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하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것도 화해 문제를 그렇게 쉽게 얘기할 것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사실은 처벌 문제가 빠지고서 어떻게 화해가 됩니까? 가해자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고,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데, 무슨 화해가 됩니까?
그리고 ‘피해자와 방관자들의 화해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 피해자와 일반 시민의 화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죠.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이에요. ‘설마 국가가 그랬겠어, 죄가 있으니까 그랬겠지’하고 그렇게 무심히 넘어간 사람들을 탓할 수만은 없죠. 그러나 피해자들이 간절히 호소하는 상황에서 그 걸 외면하면 안되잖아요. 하지만 실제 그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있고, 더 깊이 들어가 보니까 생기는 문제가 뭐가 있느냐 하면 피해자들끼리의 화해도 못하고 있더란 말이에요. 안기부에 가서 보안사에 가서 치안 본부에 가서 두들겨 맞으면서 없는 얘기를 불어야 했고, 그러면 또 누가 잡혀가야 했고, 우리가 볼 때는 피해자이지만, 그 안에서는 누구 때문에 잡혀갔다, 누가 말 잘못해서 내가 고문당했다 그런 관계가 생긴다는 거에요. 그러니 피해자들 내부에서 화해가 안되어 있는 거죠.
조사하다 보니까 25년 전에 법정에서 헤어지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피해자들끼리. 거기서 나온 얘기가 ‘아주머니 미안해’ 하니까, 숙모 말씀이 ‘니가 무슨 죄가 있니’라고 하면서 ‘니 비명 소리 듣다가 내가 까무러쳤는데, 니가 무슨 죄가 있니?’하는데, 25년 후에 내가 듣다가 정말 까무라칠 뻔 했어요. 이게 화해거든요. 이런 피해자끼리의 화해도 안된 상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거죠.
지 - 그동안은 마치 가해자들에게 화해를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은 측면도 있었는데요.
한 -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화해를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지 - 지금까지 그렇지 않은 분위기가 형성이 됐고, 그 분위기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한 - 쉽지 않을 거지만, 강풀식의 문제 제기가 필요하고, 또 하나는 보수 세력 내에서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 청산 문제를 진보 진영 일부에서도 정략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렇게 되니까 보수나 수구 세력에서도 기를 쓰고 정략으로 몰고 갔는데, 국가 기관이 고문한 피해자들을 조사해서 사과하고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벗겨주는 게 왜 진보적인 과제입니까? 정말 보수적인 과제예요. 한국 사회에서 보수 세력이 왜 신망을 못 얻느냐 하면 이런 거 안 하니까 그런 겁니다. 진보 세력이 왜 피로하냐 하면 진보 세력이 대신 이런 것을 하니까 과부하가 걸리는 겁니다. 과거 때문에 미래의 성찰을 못하고 있고요.
지 - 2006년 12월 8일 UN의 시민적.정치적 권리 위원회에서 한국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 2명의 청원에 대해 구제 조치를 권고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따라 대체복무제도를 인정하는 쪽으로 병역법을 개정해야 될 것 같은데요.
한 - 대법원에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유죄 판결이 났고, 헌법 재판소에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이 합헌이라고 나왔는데요. 헌법 재판소에서 어떻게 판결이 났느냐 하면 ‘합헌은 합헌인데, 그렇다고 계속 처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입법 정책으로 풀어야 된다. 대체 복무를 도입을 하든지 해서 이 사람들이 감옥에는 가지 않게끔 해줘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헌법 재판소에서 ‘병역법이 위헌이냐, 합헌이냐’에서는 7:2로 합헌이라고 판결이 났지만, 내용적으로는 거꾸로 7:2로 처벌하지 않는 길을 찾으라는 건데, 그런 판결이 나고 2년을 허송세월을 한거예요. 2년을. 그러고 나서 UN에서 이런 결정이 떨어졌는데, 우리가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 아닙니까?
망신이죠. 전 세계 병역 거부자 중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 사람이 1,00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900명 이상이 한국에 있어요. 르완다에서 내전을 겪으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를 280여명을 가둬놓고 있었는데, 풀어줬거든요. 그 바람에 한국에 대부분 있게 된 거죠. 전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꽤 있죠. 그렇다고 실제로 처벌을 하느냐 하면 처벌하는 시늉만 한다는 겁니다. 한국처럼 1년 반 징역을 살리는 나라가 없어요. 그나마 문제 제기가 되면서 형량이 줄어들기는 했지만요. 매일 한명 내지는 두 명이 감옥에 갑니다. 마침 복무 기간 단축과 병역제도의 대폭 개선 얘기가 청와대에서 나왔는데, 대선 공약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 변양균 정책 실장이 기획 예산처 장관으로 있을 때부터 검토를 했던 겁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한국 사회의 병역 제도라는 게 54년도에 징병제가 확립되고, 군대수가 65만으로 늘어난 이후, 기본 골격이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복무기간 3년이 2년으로 줄어든 것만 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때는 남한 인구가 2,000만이었다가 지금 4,700만이 넘게 되고, 병역 자원이 남으니까 남는 인원을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해 왔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복무 형평성이 엄청나게 깨진 거죠. 가난한 사람들이 손해보는 그 시스템이었는데, 이걸 국방부는 자기 밥그릇이라고 손을 안대니까 기획 예산처에서 국가 인적자원의 효율적인 관리와 관련해서 개혁안을 낸 겁니다. 또 하나 정부 입장에서 고민을 한 건 뭐냐 하면 가는 놈하고, 안가는 놈이 너무나 차이가 나는 거예요.
기획예산처에서 자문 회의를 할 때 두어 번 참석을 했는데, 거기서 어떤 식으로 하냐 하면 우리도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하면서 그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자료를 뽑아서 설명을 하는 게 뭐냐 하면 군대 간 놈하고, 안간 놈하고의 경제적 이익의 차이가 3,000만원이 난다는 거예요. 3,000만원 들여서 군대 빼먹는 게 걸렸을 때의 위험 부담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따지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병역제도를 이렇게 불합리하게 만들어놓으니까 군대 갔다온 사람들은 피해의식이 있는 거죠.
지 - 이번에 청와대에서 제시한 국방개혁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 그래서 기획예산처에서 준비를 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체복무제도를 대거 도입을 한다, 대체 복무제도를 통해서 군대를 빼먹는 사람이 없게 형평성을 갖춘다는 겁니다. 징병제의 원래 취지에 맞는 거죠. 그러면 ‘다 군대를 보낼 거냐’하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한국 전쟁 때 20만 가지고 싸웠습니다. 더군다나 전쟁 양상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고지 뺏기 전투 이런 게 아닌 상황이 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반영을 해서 감군을 하고, 정말 필요한 인원을 산출을 해서 적정 병력 규모를 유지하구요. 나머지 인원을 어디다 투입을 하느냐 하면 사회복지망에다가 투입을 하자는 겁니다. 어차피 저 출산 고령화,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지 수요가 엄청날 텐데, 국가가 무슨 수로 이걸 감당합니까? 복지에는 전문적인 복지도 있지만, 복지의 상당 부분은 단순 전달 체계입니다. 가령 독거 노인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려고 해도 어마어마한 인원이 듭니다. 최저 임금 줘서 예산 뽑아 보면 몇 조예요.
이것을 대체 복무하는 사람들을 시키면 되는 거죠. 국가 전략을 세울 때 여러가지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는 게 안보라면 외적으로부터의 군사적인 위협만 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니고, 사회 안전망이 없어서 안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붕괴될 위험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러면 국가 인적 자원을 거기도 투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국가 예산을 들여서 하면 최저 임금을 줘야할 거 아닙니까? 대체 복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에 1년 반이고, 2년을 복무하게 하면 돈이 적게 들고, 빨리 사회복지 배달체계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청년 실업이 많은 시대에 여기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배달인원을 관리하는 포스트가 되게 하면 우리가 사회 안전망을 단기간에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절약된 돈으로 현역들 처우 개선을 하자는 겁니다. 제가 군대 문제에서 월급문제를 2002년에 처음 제기했습니다. 사실 월급 문제가 군대문제 중에서 제일 급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문제를 제기했느냐 하면 숫자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기획 예산처에서 뭘로 정리했느냐 하면, 아까 3,000만원 차이가 난다고 했잖아요. 그 3,000만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병역세를 몸뚱이로 현물세 형태로 내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희생의 댓가, 봉사의 댓가를 줘야한다는 겁니다. 어차피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해서 몇조의 예산이 투여되는 것을 국방 예산으로 돌려서 사병 처우 개선을 해서 월급을 주자고 하는 것은 시민 단체도 반대를 안한다는 겁니다.
다만 적정 병력 규모로 줄여야죠. 군대 2년 복무하면 최소한 1년이건, 한학기건 등록금 쥐고 나와서 자기 힘으로 학교를 다니게 하든지, 사업 밑천을 하든지, 배낭여행을 가게 하든지 해줘야죠. 청와대에서 내놓겠다는 안은 상당히 합리적인 안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병역 제도가 워낙 말이 안됐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큰 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거기에 묻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거죠. 이 문제를 풀면 군대 입장에서 아주 좋은 게 있어요. ‘고문관’이 안나와요.(웃음) 자기가 군대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은 대체복무로 빠지는 거예요. 군대 인권 실태조사를 몇 번 했는데, 지휘관들을 만나보면 지휘관들이 인권 노이로제에 걸려 있어요.
군대에서 제일 신경을 써야 될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우리 부대를 어떻게 훈련을 잘 시켜서 강병을 만들 것인가’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어떻게 하면 사고가 안날까’하는 문제 사병 관리 노이로제에 걸려 있습니다. 지휘관들로 하여금 이런 고민을 덜게 하는 거죠. 다 받게 되어 있으니까 부적응자도 받게 되고, 얘네들 사고 안치게 늘 고민해야 되는데, 여기서 해방이 되는 거예요. 사회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거구요. 이번에 청와대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대선 앞두고 하루아침에 한 게 아니고, 작년부터 꽤 심도 있게 준비한 건데, 사실 깜짝 놀랐어요. 제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이고, 그런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한 사람인데, ‘아 역시 국가 기관에서 하면 훨씬 효과적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주로 병역 문제만 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이쪽은 사회 인적 자원 관리라는 차원에서 하니까 훨씬 더 진보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 당시에 변양균 장관이 하던 얘기가 제 얘기보다 더 진보적인 거예요.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는 제가 그래도 넓게 사고를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양심적 병역거부는 별로 신경 안 쓰는데, 큰 틀에서 다 해결이 되겠더라구요. 돼지 머리를 삶으면 귀는 자연히 삶아지는 거잖아요.(웃음) 그렇게 크게 보면서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합리적이고 건강한 안을 마련하고 있더라고요.
지 - 청와대가 내놓겠다는 개선안의 내용이 만족스러우시다는 건가요?
한 - 대체 복무에 대해서는 그런데, 감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어요. 국방개혁안에서 15만 감군 얘기가 나오는데, 남북 통일후까지를 염두에 두고, 그 감군안을 남한 자체만이 아니라 남북 공동 감군안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죠. 한반도 평화 정착 프로세스로 그런 적극적인 계획을 갖고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인데요. 우리만 감군한다고 하면 한국 사회에서 말빨이 안먹힐 테니까요. 감군 문제는 남쪽보다 북한이 더 절박합니다. 우리는 2년 가지고 썩는다고 하는데, 북한은 인구가 우리 절반이고, 군인 수가 두 배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복무 기간이 네 배가 되는 겁니다. 걔네는 20대 청춘이 온통 날아가는 거예요. 북한 같이 경제가 어려운 나라에서, 북한이 선군 정치를 하고 싶어서 합니까? 가장 우수한 노동력이 군대에 다 박혀 있는데요. 북한도 감군하자고 하면 제일 먼저 박수를 칠겁니다. 퍼센테이지로 하든지, 동수로 줄이자고 하든지, 남북 공동 감군안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남북 경제가 삽니다.
지 - <대한민국사 4> 외에도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라는 책도 최근에 내셨잖아요.
한 - <대한민국사>는 <한겨레21>에 쓴 거니까 포맷이 잡혀 있는 거고, 이것은 여기저기 다른 매체에 쓴 비교적 에세이적인 글을 모은 거죠. <사람이 사람에게>라고 국제 민주연대에서 나온 매체가 있었어요.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를 사실상 만든 단체죠. 그 단체를 했던 친구가 차미경씨가 있었고, 그 친구와 제가 87년도에 민청련 민중 신문에 기자로 있었고, 그때 시 쓰는 이산하도 기자로 같이 있었어요. 이산하가 <사람이 사람에게>의 편집 위원장이었죠. 그 후에 유시민을 끌어들였는데, 이 네 사람이 편집위원회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사>를 낸 다음에 여러 군데서 다른 곳에 쓴 글을 묶어서 내자는 제의가 있었는데요. 써놓은 것이 없다고 하고 말았어요. 저도 제가 써놓은 글을 모아놓지 않았으니까요. 이산하가 <사람이 사람에게>에 쓴 글을 가지고 책을 내자고 해서 ‘그게 책이 되겠냐?’고 했더니 ‘거기 있는게 훨씬 좋고, 편하다’고 하더라고요. <대한민국사>도 다른 역사책에 비하면 나름대로 편하게 썼다고 했더니, ‘스타일이 다르다. <대한민국사>가 편한 것은 쉽게 얘기해서 <대한민국사>는 다른 사람들이 양복을 입고 있을 때 캐주얼 차림으로 있는 거라면, <사람이 사람에게>는 캐주얼 차림을 넘어서서 반바지 입고 평상에 퍼질러 있는 식이다’라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사람에게>의 독자들은 최소한 나를 알고 있고, 나도 절반쯤은 이름이든, 얼굴이든 둘 중에 하나는 알고 있는 단체의 활동가들이 많아서 훨씬 더 편하게 얘길 쓸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죠. 그렇게 해서 책이 엮여진 거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흩어진 것들을 모으고, 정보보다는 입장이랄까, 사적인 부분이랄까 이런 게 조금 더 많이 들어갔죠.
지 - 알라딘 서평을 보니까 이 책에 대해 호의적으로 쓴 것 같기는 한데, ‘수구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느껴졌다’고 하더라고요.
한 - 대학교 1학년 때 많이 본 시 중에 정희성 선생의 시가 있는데, 옛날에는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사는 것’인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보니 ‘증오해야 할 것을 증오할 줄 알고 사는 것’이라는 부분이 있어요. 그 대의랄까,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사실 책을 쭉 읽고 역사적인 과정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왜 거기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지 알지 않겠어요? 그게 무조건 미운 게 아니잖아요. 적개심을 가지고 싸워왔기 때문에 그나마 한국 사회가 이 정도가 된 거죠.
지 - 예전에는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화를 내고, 피해자들이 그 피해에 대해 항의하는 것조차 빨갱이로 몰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면 거기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게 정당하다는 게 입증이 된 시절을 지나서 역사가 다시 거꾸로 돌아가 ‘니들이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냐?’고 다시 그 시절의 가해자들이 화를 내는 시절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 박근혜 같은 경우는 ‘몇 번이나 사과해야되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거랑 같은 거죠. 일본이 한국한테 사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난다는 거죠. 진짜 사과라면 한번이면 되는 겁니다. 진짜 사과하는 눈빛과 분위기라면 말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풀릴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수구세력 입장에서도 불행입니다. 그 짐을 대를 이어서도 물려줄 겁니까?
지 - 이 상황들을 진보개혁 세력이 극복해 나가야할 텐데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 - 아이고 제가 그걸 알면야...(웃음) 지금 상황이 어렵다는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실제로 어렵구요. 두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요. 하나는 낙담하지말자, 더 어려웠던 시절은 많았다는 거구요. 수구세력들의 손봐야할 사람 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저보고 조심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농담반 진담반 그런 말들을 합니다. ‘웃기지 마라. 우리가 박정희, 전두환 밑에서도 살았는데, 이명박, 박근혜 밑에서 못살게 뭐 있느냐’라는 대답을 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이것보다 더 어려웠던 적이 훨씬 많았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는 거죠. 여기까지 온 게 어딘데요. 한국 전쟁 후에 아무 것도 안남은 데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낙담하지 말자는 얘기도 하구요. 또 하나는 우리의 의지로서 이 어려운 상황과 맞서서 헤쳐나가자는 얘기를 하고 싶고, 지금의 어려움에 대해서 왜 어렵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얘기는 이 상황을 너무 쉽게 정치공학적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말자는 거예요. 물론 저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 거 바라죠. 그렇지만, 거기에 너무 급급하다가 우리가 진짜로 깊이 있게 반성해야할 것들을 놓치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외환위기 때 우리가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던 이유가 탈출 강박관념 때문이었거든요. 지금의 상황이 어렵죠. 이것도 탈출 강박 관념 때문에 공학적인 묘수풀이에 매달리기 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진짜 진지한 반성을 해야하는 거죠.
우리 사회 안에서 성찰의 계기, 그 성찰은 꼭 우리의 잘못한 점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 하 고 있는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변했구나, 젊은 세대는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부분에 대한 성찰까지를 포함해서 진지하게 반성해야 된다고 봅니다. 민주화 10년 동안 비판할 것도 많지만, 이 정권 동안에 이룬 것도 만만치 않잖아요. 절대로 후퇴하게 해서도 안되고, 지금 세상이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정권 잡았다고 해서 또 다시 민주 인사들이 국정원에 잡혀 가서 거꾸로 매달려서 두들겨 맞는 일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시스템 상에 우리가 만들어놓은 부분들,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정권이 넘어간다한들 이걸 허물 수는 없다는 말이죠. 심지어는 조갑제나 정형근이 잡아도 이걸 바꾸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정권을 내줄 수도 있고, 그러다가 정권을 되찾을 수도 있을 거구요. 그러면 정권을 되찾았을 때 확고한 민주화, 돌이킬 수 없는 민주화를 해나갈 수 있으면 되는 거죠. 여태까지는 한번도 제대로 정권을 잡아본 적이 없잖아요. 이번도 사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은 건지 어떤지 헷갈리는 부분도 많고요. 어떻게든 장기적인 비전과 플랜을 가지고 방향을 세워나가는 부분들을 잘 못했는데, 한번 정부에 들어가서 국정을 운영해본 사람들이 이쪽 진영에 쌓일 거고, 청와대에 있었건 국회에 있었건 정부 부처에 있었건 그 경험들이 쌓일 거고, 그것들이 축적이 되어 가면서 우리도 국가발전, 사회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세울 수 있는 그런 인적 자원들이 형성이 될 테니까 그런 것들에 의거해서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을 키우는 그런 성찰의 기회를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지 - 강준만 선생이 인용했던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더군요.”라는 말이 있던데, 그렇게 사람됨이라는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보수가 아쉽다는 거군요.
한 - 과거 청산 문제는 진짜 보수적인 아젠다거든요. 그리고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때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하는게 훨씬 더 좋아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이것도 해야지 않느냐’ 하고 조언을 하고, 그렇게 가야 하는건데, 이걸 그쪽에서 안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거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도 과도하게 나간 부분이 있고, 우리 안에 정략적인 계산이 틀림없이 있었던 것이구요. 육군 중위 이런 부분들이 그런데, 박정희를 왜 친일파로 잡습니까? 군사 독재로 잡아야죠. 그런 부분을 반성해야되구요. 한국 사회 전체의 아젠다화를 못했었던거죠. 가령 저는 과거 청산 부분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가 잡으면 시민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좋아지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지 -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감수하셨다고 하던데요.
한 - 감수는 아니고, 시나리오를 한번 읽고, 영화 가편집이 끝났을 때 같이 한번 보고 그랬던 거죠. 영화는 ‘아리랑’에 깊게 관여를 했는데요. MK 픽쳐스에서 정지영 감독이 만들고 있는데, 그게 시나리오가 잘 안써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그 영화사에서 노근리 사건을 가지고, ‘작은 연못’을 만들고 있어요.
지 - 그 영화와 관련해서 박지만씨의 명예훼손 소송에 증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셨는데요.
한 - 그걸 박정희의 사생활이라고 저쪽에서 얘기하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의 사생활 문제입니까? 대통령이기 때문에 경호 문제가 있으니까 기관을 사용하는 건 좋지만, 박정희가 개인 돈으로 여자를 조달한 것도 아니고, 국가 예산을 가지고 중앙정보부의 의전 과장이 직접 조달을 한거잖아요. 육영수 여사가 떠난 다음에 박정희의 여자 문제가 왜 문제가 됐냐 하면, 사실은 젊은 여자와 재혼을 시키는 게 제일 좋죠. 주변에서 서로 견제를 해서 못하게 하는 거라, 왜냐하면 들어와서 장희빈이 될지, 왕후마마가 되어서 권력을 행사할지, 그 여자와 관련된 쪽으로 아무래도 권력의 판도가 바뀔 수 있으니까 그걸 신경을 쓴 거죠.(웃음) 그렇게 박정희의 여자 문제는 권력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 버리니까 얘기가 복잡하고, 지저분해진거죠.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은 사실은 그 부분을 다룬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그때 그 부분과 연루되어 영문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얘기를 임상수 감독은 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영화가 재미가 없어졌다고 할까요. 영화로서 관객을 끌기 위해서는 암살 사건만 다루고, 박정희가 끝부분에 죽었으면 영화가 흥행에서는 더 나았을 텐데요. 영문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까 그 이후에 우왕좌왕 하는 얘기가 중심이 된거죠. 김재규도 박정희의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점잖게 얘기했잖아요. 법정에서 박선호가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얘기하지마’ 하고 저지를 했고, 자기도 얘기를 하지 않았잖아요.
지 - 임상수 감독은 굉장히 시니컬하게 ‘우리가 저 때 저 꼬라지로 살았던거야?’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요. 영화를 보면 박정희가 굉장히 지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자체만 보면 막연하게 암살을 예상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들던데요.
한 -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재규나 차지철은 굉장히 심복이었잖아요.
지 ? 평화 박물관 건립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습니까?
한 - 집 짓는 계획 빼고는 사업이 굉장히 많이 커나가고 있는데요. 사실 평화운동이라는 게 한국에서 본격화된 게 (그 이전에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2003년입니다. 이라크 파병이 굉장히 큰 계기가 됐죠. 그 전에 베트남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벌였는데, 이라크 파병하는 것을 보면서 ‘미안해요 이라크’를 또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베트남 파병 때는 6~7세 때였으니까, 파병 국가의 국민이었지만 내가 직접 책임질만한 문제는 아니었잖아요. 물론 파병 국가의 국민으로서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고,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그 운동을 했지만, 지금 40대의 교수이자 한국 사회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하고는 엄청난 무게의 차이가 있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평화 박물관을 시작을 했고, 이라크 파병의 충격 속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통해서 성장한 세력들이 평화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할까, 평화운동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할까요?
평화 운동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이라크 파병, 북핵, 한반도 평화 정착, 주한미군 문제, 대추리 등 현안 중심의 운동이 필요하죠. 사실 그런 거 하기에도 힘겹고요. 그런데 그 운동을 잘 하려면 든든한 평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평화박물관은 일선에서의 평화운동, 농담반 진담반으로 땜빵운동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에 즉각즉각 대응을 하는 그런 형태의 평화운동도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걸 잘하려면 평화 감수성과 평화 교육이 튼실하게 받쳐줘야 되는데, 가난한 집일수록 저축을 못하잖아요. 사실은 가난한 집일수록 저축이 더 필요한거죠. 평화박물관 운동이 그런 일선에서의 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평화감수성과 평화 교육 문제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나가자, 박물관이니까 전시를 매개로 하고, 교육 자료를 생산하고, 이런 방향에서 역할 분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일을 시작한지 3년쯤 되니까 틀이 잡혀 가면서 안에서도 사업에 대해서 자신감 같은 게 생기고, 지금은 사업이 뻗어나가려고 하는 단계예요. 제가 와서 그 역할들을 같이 하고, 사업을 하려면 필요한 자금도 끌어오고 해야 되는데, 과거사에 발이 묶여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죠.
지 - 선생님도 그렇고, 제가 만나는 여러 분들이 한 사람이 저렇게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과부하가 걸려 있는 것 같은데요.
한 - 평화박물관은 요새는 실무적인 부분은 거의 못하고, 방향 잡고 사업 결정을 하고 그런 정도만 하구요. 우리 상근 활동가가 다섯 명이예요. 시민 단체로 치면 큰 규모가 아니지만, 평화단체로서는 큰 규모입니다. 좋은 분들이 아주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고요. 평화의 개념을 잡아가는 작업들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뭐가 평화냐, 아주 작게 얘기하면 전쟁 반대이고, 전쟁과 관련된 이슈들, 군사적인 부분과 관련된 이슈들이겠죠. 저는 평화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다보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면 평화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평화를 그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추상적이고, 남의 동네 얘기가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냥 좋은 얘기가 되는 거죠. 내 얘기가 아닌, 내 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소위 당위적이라고 하는 게 되는 겁니다. 매맞는 여성한테 가서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건 폭력이죠. 매맞는 여성에게는 안맞는 것이 평화인거고, 배고픈 아이한테는 밥이 평화인 것이고, 졸린 사람에게는 잠이 평화인거죠. 이주노동자들 같이 추방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는 여기서 살 권리가 있어’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내가 어떻게 평화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냐’를 고민해보니까 평화 개념을 저렇게 묶어놓아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러면 운동의 영역이 어디까지냐 하는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천수관음이라고 할까요? 관음보살이 수천 개의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평화라는 것은 형태가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 박물관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치유에 관련된 건데요.
치유에 대해서는 여러 군데서 얘길 많이 한단 말이에요. 평화운동은 어떻게 좀 다르게 접근을 할까 하면, 치유 문제를 접근을 하긴 하되 평화 운동의 전통적인 이슈와 관련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전혀 얘기가 안되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 문제로 인한 PTSD, 한국 전쟁 때의 상이군인들, 그리고 국가 보안법에 의해서 상처받은 사람들, 조작간첩, 국가폭력, 고문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서로 어떻게 화해해나갈 것인가? 일반적인 심리치료 그런 거하고는 다른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구요. 우리가 베트남 문제로 출발을 했지만, 베트남과 화해하는 길이 꼭 민간인 학살 얘기만 갖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베트남과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는 속에서 옛날 그것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게 바람직한 것이지, 우리도 일본 사람 만났을 때 밤낮 정신대 문제 얘기하고, 강제 동원 얘기하고, 그러고 싶지는 않잖아요. 그 사람들이 과거를 잊고 엉뚱한 얘기를 하니까 우리도 화가 나니까 그런 문제를 자꾸 얘기하는 거죠. 건강한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베트남과 관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중에, 이주 여성 문제를 평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겁니다. 한국 땅에서 이주 여성이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것, 이주 여성 가정에서 나온 혼혈 자녀들이 한국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평화운동이 무엇을 할 것인가, 저건 이주 노동자 문제니까 인권문제, 여성문제로 미뤄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베트남과 관련된, 베트남을 통해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관련된 그런 뿌리를 가진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자’고 해서 우리가 기획한 것이 자기들 엄마 나라의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처음부터 자랑스럽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눅들지 않게 그 나라의 얘기들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서 애들 그림책부터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평화 운동 차원에서 어린이 평화 도서 얘기들을 하면서 안이 나온 건데, ‘베트남 그림책을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 필리핀 그림책을 번역을 하자, 거꾸로 콩쥐팥쥐, 춘향전, 심청전을 그 나라 글로 번역을 하자’는 생각을 한거죠. 왜 한류는 드라마나 대중가요만 해야 합니까? 문화 교류 사업이기도 하고, 문화 교류 사업을 그렇게 하면서 방법을 찾아나가야겠죠.
그 속에서 가령 베트남 그림책을 한국에서 만들자고 하는 것보다 심청전을 베트남에 보내자고 하는 게 돈을 만들기가 더 쉽겠죠.(웃음) 그런 속에서 이 프로젝트를 같이 묶어서 수많은 이주 여성들과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한테 다양한 엄마나라의 얘기들을 접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자고 해서 ‘엄마나라 이야기 프로젝트’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고요. 조그맣지만 여기가 인사동 권역이잖아요. 여기에 평화를 내걸고 예술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죠. 전시회 수준이 점점 높아지는데, 대추리 전시회도 하고, 국가보안법 전시회도 하고, 미세스 사이공전도 했어요. 또 김형률씨와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2005년도가 해방 60주년이잖아요. ‘2004년도에 내년에 어떤 사업을 할까, 해방 60주년 가지고는 다른 데서도 많이 할 것 같고, 평화운동 단체로서는 뭘 할 수 있을까, 잊혀진 게 뭐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다가 원폭 문제가 떠오른 거죠. 저도 굉장히 오지랖 넓게 잡학 비슷하게 했지만, 그 문제는 별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모를 때는 잘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수니까 원폭 문제를 가지고 누가 열심히 활동하느냐고 물어보니까 김형률씨를 소개해주더라고요. 만나보니까 35kg이에요. 그 친구한테 배우면서 일을 준비하고, 작년에 원폭 전시회 준비를 해서 처음에는 서울하고, 부산하고 그렇게 전시하는 걸로 잡았다가 10개 도시에서 하게 됐어요. 처음 간신히 발을 뗀 셈이죠.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제안을 했고, 건강세상네트워크, 원폭2세문제 공대위 그런 단체들하고 같이 준비를 했는데, 김형률씨가 작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전시회 오픈하기 직전에 세상을 떴는데, 김형률 추모사업회를 만들어서 추모사업회 사업을 겸해서 평화 교육의 일환으로 원폭 문제를 계속 알리고 전시하는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사이버 상에도 우리 작업의 성과들이 쌓이고 있고요. 평화박물관이 엄청난 건축물을 지으려는 운동이라기보다는 평화 감수성을 위한, 평화 교육을 위한 작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고, 그런 활동들이 축적이 되다보면 집은 자연스럽게 지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집은 좀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고, 오히려 있는 공간을 활용해서 게릴라적인 전시물을 만들어내고, 그 전시물을 도로 지역으로 가져가는 거죠. 원폭 전시물 같은 것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내기는 어렵잖아요. 원폭이든, 이라크 문제든 그런 것들을 전시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서 지역에서 순회 전시를 할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만들어내고, 평화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파트너들을 만들어내고, 이런 작업들을 박물관이 하려고 하고 있죠.
지 - 올해 특별한 계획은 없으십니까?
한 - 올해로 안식년이 끝나는데, 고민이 많죠. 과거사위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계속해야하지 않나 싶은데, 휴직을 하든지 하고 이쪽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구요. 일을 더는 안벌리고, 평화박물관에 좀 더 집중할 생각입니다. 이 안에도 사업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든요. 평화운동을 하면서 후방 사업을 맡은 건데,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지 - 사람들한테 평화 감수성을 심어주는 게, 엄청나게 중요하고,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한 - 2~3년 지나니까 그런 얘기들이 공감을 얻고, 또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하는 분들이 나타나고,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고요. 평화 감수성이라는 부분도 과거에 이라크 전쟁 처음 시작되고, 여기서 평화운동이 처음 대중화되던 때에 비해서 장족의 발전을 했죠. 우리 안의 파시즘이나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과 차이가 있는 것이 한국 사회에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의의 노력과 입장들이 갖춰져 있다고 봅니다. 가령 이주 노동자 같은 경우에 맨 처음에 이 문제가 터졌을 때는 말도 못하게 열악했는데, (여전히 문제는 심각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아주 급격하게 달라졌죠.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랄까, 한국 사회의 여론의 향배가 완전히 기울었다는 말이에요.
물론 제일 공헌이 컸던 것은 느낌표죠. 느낌표 같은 문제 제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주화 운동이 배경이 된 것이고, 386 정치인들을 욕했지만, 학생 운동 출신의 386이나 그 이전의 긴급조치 세대들이 각계에 포진해서 그 시절에 추구했었던 가치를 그래도 잃지 않고, 지금 입장에서 자기가 처해있는 위치와 자기가 획득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그걸 발휘하려는 노력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느낌표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거죠. 교양과 재미를 함께 주자고 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안될 것 같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선택했잖아요. 오락 프로그램에서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닌데, 그걸 선택을 하고 만들어 냈잖아요. 그게 국민들한테 굉장히 강한 영향을 줬고요. 베트남 문제는 느낌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 <한겨레21> 독자들이 먼저 움직이고, 오히려 뒤늦게 시민 단체가 붙었다고 할까요.
그런 걸 보면 한국 사회가 저력이 있는 것 같아요. 민주화 운동의 부정적인 경험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부분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봐요. 거기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때의 경험들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 -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한 - 없습니다. 얘기 많이 했잖아요.(웃음)
가져온 곳 : http://blog.naver.com/pungdang2?Redirect=Log&logNo=15001431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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