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事

나의 초임지

들풀처럼1 2008. 10. 26. 07:58

 

 

 ▲ 38년전 나의 초임지, 본교가 분교 되었다가 폐교되었다. 지금은 심신수련장

오른쪽 노란잎을 달고있는 감나무. 아이들과 함께 심은 감나무는 무척 자라있었다.

 

당시는 벽지학교는  좌천된 교사들이 모이거나 부가점수를 얻어 승진하려고 일부러 자원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술중독으로 수전증 얻은 사람도 훗날 국회의원을 꿈꾸다 영어의 몸이 된 사람도 만났다.

내가 만난 첫 아이들은 그해만으로도 내가 네번째의 담임이었다. 얼마나 인사가 잦았으면 그리 되었을까와  당시의 교직이 얼마나 이직률이 높았는가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은 그토록 빈번한 담임 교체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벽지의 교장과 교감들은 힘이 없어 밀려온 관리자들이라 이들의 임지를 결정하는 인사권자들이 설득 아닌 압력으로 수시로 교원들의 빼가고 보내는 일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지역무시와 소외의 극치를 첫 발령지에서 봤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첫 봉급명세서를 보니 보험 가입비가 있었다. 나는 가입하지도 않았는데 교육청에서 친절하게도 보험을 가입하고 보험증서를 보낸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상급기관이 보험까지 들어줬으니 오히려 감사해야했었나? 내 의사와 무관하게 보험가입이 이루어진 분통함으로 학교장에게 항의하고 면전에서 보혐증서를 박박 찢어버렸다.

더 서러운 일도 있었다. 가을이면 체육대회를 했었다. 각 면단위별로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모였다.  교육장은 높은 연단에서서 교사들의 사열을 받았다. 완전히 군대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기수가 '우로봐'하면 행군 중에 있는 교사들은 거수경례로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이다. 당시의 군부독재가 사회적 분위기를 이렇게 몰아 갔다.

비상계엄상태에서 유신헌법을 만들려고 온갖 책동을 일삼은 박정희 정권은 교사들을 담당 마을로 출장시켜 국민투표 찬반여부에 대한 성향분석을 하여 보고하는, 체제의 종노릇까지도 시켰다. 퇴직 전에 젊은 교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믿기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공권력들이 권력의 시녀로 작용했던 1970연대의 공직사회나 최근의 YTN으로 상징되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이란 잘 못쓰면 조폭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라진지 오래된 곳엔 엉뚱한 것들이 주인되어 진정어린 방문자들을 이방인로 몰았다. 이곳 졸업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닯고 시릴까?

 

 

 

▲  보이는 긴 흰 건물 자리에서 불록으로 지은 집이 있었다. 겨울이면 외풍이 어찌나 센지 나너 할 것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었다. 취사용 연료는 석유곤로였고 난방용 연료는 장작이나 건초 아니면 물거리였다. 연료 때문에 가을 추수가 끝나면 주민들이 나뭇단을 몇개씩 거둬 주었다. 이것으로 조석이면 매캐한 연기 마시며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땔감이 부족하니 낫들고 인근의 산에 올라 땔감을 구하기도 했다. 그 때의 온정들이 아직도 제자들과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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