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事

산절로 수절로

들풀처럼1 2005. 8. 1. 13:25


<김인후의 자연가>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청산자연자연 녹수자연자연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산자연수자연 산수간아역자연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푸른 산도 자연이요,
푸른 물도 자연 그것이로다.

산도 자연이요 물도 자연인데,
그 산수 사이에 살고
있는 나도 자연 그것이로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자연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자연대로 하리라.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조선 왕조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호는 하서(河西), 담재(澹齋) 등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박수량과는 같은 장성출신으로 박수량의 생가터인 아곡리로 들어가는 길복 필암사람이다.기하(畿下)의 김안국(金安國), 호남의 김인후(金麟厚), 조광조(趙光祖), 영남의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조식(曺植)등을 이 시대 사림(사림)의 우두머리로 꼽는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42년에 홍문관 저작(著作),1543년(중종 38)에는 장차 인종이 될 세자와 깊은 사제의 연(緣)을 맺게 됨으로서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弘文館博士兼世子侍講院設書)가 되어 세자 보도(補導)의 직분을 맡았다. 

이무렵 동궁 실화(失火)의 변고가 일어나자 하서는 분연히 차문(箚文)를 올려 사풍의 쇄신과 교화를 주창하고 아울러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기묘사림들의 신원(伸寃)을 호소하였다.
하서는 34세때(1543. 중종38년)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그해 12월에 옥과 현령(玉果縣令)을 제수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1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하서는 병을 이유로 옥과현감마저 사퇴하였다.

그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문득 집 남쪽의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 한결같이 하여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

죽은 후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하서집>, <주역 관상편>, <서명사천도> 등이 있다.
김인후는 조선12대 임금 인종(1515~1545)과 군신지간이란 각별한 인연으로 묵죽도를 하사 받기도 했다. 그 묵죽도 판각이 필암서원 경장각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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