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事

오죽장

들풀처럼1 2006. 6. 4. 07:50
지난 1995년도에 죽세공 명장으로 선정된 언강(蔫疆) 윤병훈(70세)씨의 작업장이자 거처이기도한 언강 죽장(竹裝)전시관은 북촌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강 죽장(竹裝)전시관.
세계에서 단 한 곳뿐인 오죽 공예 작품 전시관이라고는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초라해 보였다. 한옥 한 채를 개조해서 다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공사가 아직은 마무리가 되지 않아 작품들이 먼지를 이고 있었다. 허리가 굽은 윤 명장이 직접 나와 맞아주며 전시관을 안내한다. 문득 이제는 지난시대의 풍물쯤으로 여겨지는 죽세공예품과 윤 명장의 노구가 오버랩 된다.

평생을 오죽과 함께한 윤 명장은 죽세공 명장으로 선정된 이듬해인 1996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5호 오죽장으로 지정, 2002년부터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에 터를 잡았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원서동, 계동, 재동, 안국동, 소격동, 사간동, 송현동, 화동 일대로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사이에 위치한 지역.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 온 우리의 전통 거주지이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 불렸던 예전의 고급 주거지였으며 조선시대 문무 대신들과 양반들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승하한 곳이 안국동, 율곡 이이가 살던 곳이 이웃 지역인 인사동이다. 조광조의 집은 교동 초등학교 자리였으며,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바로 인사동이다. 개화사상가 박영효가 살던 집이 지금의 경인미술관 자리였으며, 지금도 안국동 윤보선가, 성삼문 집터, 김옥균 집터, 3·1운동 최종 회합 장소였던 손병희가 등 많은 세도가들의 흔적과 문화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촌한옥마을'은 서울시의 지원책에 힘입어 주민들 스스로 한옥을 사들여 전시관과 공방, 민박장소 등으로 활용하고,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찾아들면서 자연스럽게 전통과 예술이 접목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어 서울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북촌에는 묵묵히 전통공예의 맥을 이어가는 장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오죽공예 기능보유자 윤병훈 명장을 비롯해, 안국동의 생옻칠 기능 보유자 신중현 씨, 삼청동 전통염색 및 매듭기능 보유자 조일순 씨, 소격동 전통 다식 기능보유자 이옥호 씨,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씨, 전통 철공예 노인정 씨, 한복과 생활공예 기능 보유자 김도선 씨 부부 등등.

아울러 가회동의 장승 목조각가 신명덕 씨, 삼청동 전통인형 제작기능 보유자 임소현 씨, 가회동 효당가반야로 차도문화원장 채원화 씨, 한국전통문화연구소를 운영하는 조선의 씨 등도 북촌주민이다.

오죽장 언강 윤병훈.
윤병훈 명장은 우리나라 단 한 명의 오죽장이다.
오죽장이란 죽세공예장으로, 대나무 중 오죽을 이용하여 생활용품이나 고급 가구를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다.

그의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명장으로 선정된데 이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오죽을 이용한 죽세공의 명맥이 보존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오죽공예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한곳뿐인 북촌문화센터의 오죽공예 강좌는 수강신청이 끊기고, 세계 유일의 우리 우리네 전통공예의 한 맥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언강 죽장전시관의 작은 방을 채우고 있는 서안, 문갑, 장, 함은 얼핏 나무로 만들어진 여느 가구나 소품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대나무로 그것도 까만색을 띤 오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저마다 섬세하고 독특한 개성을 숨기고 있다. 오죽을 작은 조각으로 자르고 일일이 이어 붙여 무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예로부터 까마귀를 사람 다음으로 쳤어요. 부모 공양하는 건 금수 중에 까마귀가 유일하거든요. 반포지효라고, 새끼가 자라서 제 입살이 할 줄 알게 되면 부모 공양을 시작한단 말입니다. 삼재를 물리치는 부적에도 까마귀가 그려져 있죠.”
이렇듯 기특한 까마귀가 오늘날 흉조가 된 것은 순전히 오해의 소치라고 윤 명장은 말한다.
“역병이 돌거나 초상이 나면 까마귀가 그걸 예고해주느라 미리 우는데 그 고마운 일이 오해를 불러온 거죠.” 오죽의 명칭을 설명하는 윤 명장의 어투에는 오죽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대나무는 세계적으로 400여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왕죽(王竹, 참대) · 분죽〔淡竹, 솜대〕· 오죽 · 신어리대 · 산죽(山竹)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에는 오죽을 많이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자죽(紫竹), 일본에서는 흑죽(黑竹)이라 불리는 이 대나무가 오직 우리나라에서 오죽이라 불리는 것은 반포지효의 고사성어처럼 효를 강조하는 전통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오죽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동해안 남쪽에서 자라는 오죽이 질이 좋고 기물을 만드는데 적합하다. 따라서 오죽은 강원도 삼척을 기점으로 해안선을 따라 동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목포에 이르기까지 해안지역에서 자라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오죽은 채취 직후 그냥 쓰면 갈라지고 터지기 때문에 최소한 5년에서 10년을 말린 후에야 비로소 죽장품의 재료가 된다.


                                    편광에 의한 기하화법 개발


죽장공예품은 정성어린 손길과 혼이 깃들지 않고서는 결코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윤 명장의 손가락 마디만 봐도 이내 알 수 있다. 그의 열 손가락은 모두 끝이 직각으로 휘어져 있다. 끝마디는 혹처럼 불거지고 손톱은  뭉개져 있다. 40여 년간 죽장공예장인으로 외길을 걸어온 그의 삶을 고스란히 말해 준다.

5년 이상 햇볕에 말려 비로소 제 빛을 갖게 된 오죽을 갈고 다듬어 만든 조각들을 수천 번 세심한 손길로 가다듬고 붙여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루 16시간 이상 대나무를 다듬고 붙이는 작업을 계속하다보니 손이 성할 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 명장은 손이 망가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주위에서 말해주어 비로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지금은 척추까지 굽어 거의 90°로 구부린 채 지팡이에 의지해 몇 걸음 옮기기도 버겁다며 ‘머릿속은 그게 아닌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나로 인해 내 수족이 많은 고통을 당한다”며 자신의 수족에게 미안하다며 고소를 금치 않았다. 윤 명장이 각고의 노력과 연구 끝에 이루어낸 그만의 기하화법은 이런 산고를 치룬 결과물이다.

“제 작품은 빛을 받아야 비로소 제 모습을 찾습니다. 빛의 양에 따라 오죽이 짙고 옅은 색을 발하고, 빛의 반사에 따라 여러 문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제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류함.
언강의 작품이 명품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수많은 오죽 조각들이 조명의 종류와 각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데 있다. 10년 만에 완성된 서안의 경우 작은 오죽 조각을 무려 5555쪽이나 이어 붙여 완성했다. 만자(卍字)무늬를 이어간 서류함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과 명암이 다르고 문양이 새롭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기하화법이라고, 만자무늬 같은 것을 말하죠. 서울대 미대 학장이었던 박세원 교수가 그 무늬를 퍽 아꼈어요. 내 작품을 얻어다가 일주일간 집에 두고 햇빛, 달빛, 형광등 빛, 백열등 빛 닥치는 대로 비춰봤다더군요. 당시만 해도 그걸 알아주는 이가 대한민국에서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기하화법문양’은 단순한 문양에서부터 형상과 연결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문양까지 천차만별이다. 죽공예품으로는 엄두도 못 내던 기화화법 문양을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대나무와 한평생


40년 전, 윤병훈씨는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 스위스에서 시계를 대량 수입해서 판매하는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헌책을 교부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충남 부여의 어느 중고등학교에 책을 납품하고 오는 길에 농부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대나무를 베어서 내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어렸을 적 선친으로부터 자주 들었던 소상반죽이라 하여 사대부들이 관상용으로 귀하게 여기던 오죽이었다. 울진군 평해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죽을 찾아 대한민국을 다섯 바퀴나 돌고나니 멀리서 봐도 대나무의 종류를 알아볼 만큼 되었다. 그날도 대나무를 찾아 길을 가다 옛 기와집 둘레에 심어놓은 오죽을 보고 무작정 차에서 내렸다.

“그곳 이씨 댁 왕대밭과 송부종 씨댁 오죽밭이 있는데 서로 이웃하면서도 상대 영역을 침범치 않고 제 지경을 지키는 것을 보고 깨달았지요. 한낱 식물조차도 제 자리를 지키고 이어나가는데 ‘나는 무언가, 나는 30이 되도록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지게 되었지요.”

“오죽은 아무 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이율곡 선생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이나 정몽주 선생이 순절한 개성 선죽교 등 선비의 절개가 담긴 곳에서 자랍니다. 버려진 오죽을 보는 순간 그것을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오죽과 함께한 그의 생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나무는 부러질망정 굽히지 않아 인간의 정절을 표현하는데 좋은 비유가 되므로,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4군자라 불렀다. 특히 오죽은 소상반죽(瀟湘班竹)이라 하여 초나라의 충신 굴원의 죽음과 관련된 고사를 낳기도 했다. 때깔이 아름답고 윤기가 있으며, 다른 대나무에 비해 질이 좋다.

그는 그렇게 귀한 오죽이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뭔가 만들어 보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오죽의 분포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을 다섯 차례나 돌아다녔다.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가 하면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했다. 7남매의 가장인 그가 오죽에 미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용케 분포지역을 파악했다 하더라도 주민들이 쓸모없다고 베어버리기 일쑤였다. 생각다 못해 그는 몇몇 사람들에게 돈을 주며 오죽을 보존해 달라고 부탁했다. 몇 년을 그러다 보니 94평짜리 집을 날리고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래도 오죽을 제품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그는 대 나무를 가공하여 수출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 년 동안 대나무의 붙임질 등 여러 공정을 익혔으나 별다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더구나 죽장공예가 사양길에 접어든 무렵이라 맥을 잇는 사람도, 뛰어난 스승도 없었기에 옛 문헌을 보며 혼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초기 작품 활동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다. 죽장 전반에 걸친 제작기능을 홀로 습득한 그는 1977년 응봉동 그의 집 옥상작업실에서 충효정절의 혼이 깃든 대나무 마디마디에 온 국민의 통일 소원을 담은 대작현판 ‘염원’을 제작, 80년에 완성하게 된다.

  그것을 전두환 씨에게 선물하였는데, 그 일으로 한때 성동경찰서의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던 그는 광주사태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책감에 사로잡혀 서울을 떠나 청평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가정을 등진 일종의 가출이 되었고, 지금도 그는 가족과의 소외감이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말한다.

책장.
청평에 있던 1년 여,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서부터 그의 작품 활동에 지장이 오기 시작했다.  다시 설악이라는 마을로 옮기고 거기서 16년간 그의 오죽공예를 전수 받던 수제자 최선희 씨를 만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최 씨 부모의 도움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을 떠나 여주군 강천면 이호리로 작업장을 옮겼다. 남북통일염원을 담은 작품으로 각종 대회에서 입상과 대상, 특별상을 수상 하게 된다.

신비감마저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지난 1994년 태국왕실 초청 아시아 죽제품 전시회에 출품하여 중국의 한 작가로부터 '오죽신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우리나라 죽장공예의 독창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봄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이듬해 인간문화재의 반열에 올랐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40여년 대나무와 씨름하며 일궈온 경력은 화려하다

- 기하화법을 응용한 처녀작 '염원' 제작완성(1980)
-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전통공예전 초대출품(1986)
- 인간문화재 공예대전(미국 LA)에 출품(1989)
- 노동부 등죽세공예 명장선정(1995)
-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15호 지정(1996)
- 전승공예대전 입선(1980∼1993) 및 장려상(1991∼1995) 수상
- 제2회 아시아평화통일 문화대전공예부문 금상/80년 완성작 '염원' 출품(1983)
- 전승공예대전 제19회 문화체육부장관상(1994) 등 수상경력 다수
인고의 세월이  맺은 결실들이다.
오늘도 그는 하루 15-16시간을 휘어버린 손끝마디로 대나무를 깎아 책상, 서류함, 보석함을 만들어 가고 있다. 


                                    죽장공예 전 세계에 알릴 터


윤 명장은 세계 유일의 오죽공예인이다. 때문에 혼자만의 힘으로 연구하고 제작기법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작품을 보며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그 원리를 터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편광에 의한 기하화법'이다. 그의 작품은 빛을 받아야 제 모습을 찾는다. 짙고 옅음에 따라 스물다섯가지의 색으로 구분되어 붙여진 대나무 조각들이 빛의 반사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그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꽃이 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가 되기도 하는 모양들은 그가 개발한 독특한 것이다.

“죽장공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보존되고 있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우리만의 자랑거리입니다. 요즘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 지를 연구 중입니다.”

장롱.
 고려시대에 매우 수준 높은 대나무 공예 작품이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 때는 오죽의 벌목을 국법으로 금했다고 한다. 인공 재배가 불가능하고 충신이나 열녀의 사당 주변에만 자생했던 탓에 오죽은 자연스럽게 귀한 재료가 되었고 오직 ‘선공감’이라는 관청에서만 오죽으로 공예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왕의 하사품이나 조공을 바칠 때 진상품을 넣어 보내는 상자로만 사용되었다.

유성룡의 종가 집에 그가 사용하였다는 오죽으로 만든 서안이 남아있는데 그 기교가 매우 정교하고 튼튼하여 4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옛 조상들의 선비정신이 깃든 오죽공예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중요한 문화적 재산이다.

“우리나라는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에만 투자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오죽세공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투자의 눈을 돌릴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믿을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오죽공예 작품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저의 소박한 소망입니다.”

 윤 명장은 국내에서 단 한사람뿐인 죽장 공예인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시련 속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집대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죽장공예는 100% 수작업인데다 여름과 겨울은 아교가 붙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다.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길어 작게는 1년에서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것도 있어 시쳇말로 돈과는 거리가 먼 공예라는 것이다.

“오늘 만 원을 들여 어떤 일을 도모하면 내일 1억이 남아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이 작은 함을 하나 만드는데 재료 말리고, 저장하고, 쪼개고……일 년 이상이 걸립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여한은 없는데 젊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요.”

후계 문제도 그렇다. 슬하에 7남매를 두었지만 자식들에게 작품은 한두 점씩 선물해도 가업을 이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서 시작했듯 자식들도 스스로 좋아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전시관과 모든 작품은 16년 간 같이 해온 제자에게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작품의 깊이가 얕아지는 것을 본 후 작업을 만류했다고 한다. 윤 명장은 그것을 “대나무가 그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 것을 만드는 사람의 인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윤명장이다.

세계를 통틀어 하나뿐인 오죽공예의 제작기법을 문헌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윤병훈 명장은 단호하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나 혼자 공부할 때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죠. 왜 오죽에 대한 책은 이리 드물까, 왜 선인들은 후대를 이리 힘들게 하나……. 그런데 막상 책 내려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덜컥 든 거예요. 물질만능이 팽배한 세태에서 책을 내면 악용될 게 뻔하고 대나무의 정신이 훼손된다 싶어 책 생각은 접었습니다.”
“온고지신 같이 지금도 무언가를 이룩해서 선인들 것보다 더 탁월한 것 만들 수 있다”고 윤 명장은 말한다.

2002년 윤병훈 명장은 ‘죽제품의 제작방법’에 관한 특허를 획득했다. 습 · 건 · 한 · 온 ·  열대 등 어떤 자연조건에서도 끄떡없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제작기법의 특허를 냈으나, 이를 뒷받침해 줄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
“계획서를 써내라, 수익성을 증명해 보이라는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얼마만큼의 수익이 있을지 알 수 있느냐”며 허허 웃는다.

‘특허 받은 기술대로 작품을 만들어 남기고 싶은데 모두가 외면하니 할 말 없다. 특허도 악용을 우려해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있다’고, 선인들이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단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윤 명장의 작품 ‘고비’와 ‘지통’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 세계만방에 우리 문화를 자랑하고픈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바람이라고.
천직이자 운명인 오죽장의 길을 걸어오면서 대나무처럼 곧게 살며 환경에 지배되지 말자는 신조로 살아왔다는 윤병훈 명장.

“적응이 안돼요. 내가 줄곧 살아온 세상인데 그런 말 하면 이상하죠? 세상과 싸우기 싫어 공방에 숨어 삽니다. 맞닥뜨리기만 하면 세상은 자꾸만 나더러 참으라, 굽히라, 바꾸라, 어휴……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너무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보기 싫어요. 대나무는 저렇게 살아있는데, 대나무가 저리 직진하는데 나도 직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 문화, 우리 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윤 명장. 작금에 대두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거울삼아 눈앞의 우리문화부터를 살려야 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계획은 무궁무진한데 수족이 제대로 놀지 않아 머릿속만 아프다는 그. 200만원의 수술비가 없어 운신을 못하는 세계 유일의 오죽장 윤병훈 명장-. 그의 피땀 어린 손길에서 우리의 전통공예의 한 맥인 오죽공예의 미래가 찬란하게 펼쳐질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홍 창 신/작가>
내용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78&article_id=0000003744